칼럼

몸의 순간을 획득하는 역설적 차원

허명진


“사람이 낯선 곳에 가면 온몸이 귀가 된대요.” 안대를 쓴 관객이 퍼포머에 의지하여 골목길을 헤매게 하는 동선을 안무했던 위성희의 <극장흉내>(2023)는 이 같은 퍼포머의 말로 끝맺는다. 그것도 시야를 가리는 갑갑한 안대에서 이제야 벗어났다 싶은 순간, 처음의 출발 장소와 전혀 다른 곳에 관객을 떨궈둔 채, 길을 인도하던 퍼포머가 마치 약을 올리듯 길모퉁이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눈만 가리지 않았을 뿐이지 안대를 둘렀을 때와 같은 초민감적 몸의 상태는 아직 해소될 리 만무하다. 물론 곧 휴대폰의 GPS를 통해 귀갓길을 찾아내겠지만, 그전까지는 일종의 야생적 감각을 내재한 몸이라는 지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눈이 신체의 한 부분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신체로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눈은 그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분열될 때 비로소 신체로서 느껴진다는 것이며,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순간을 숲에서의 체험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화가 앙드레 마르샹의 말을 인용하여, “내가 숲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무가 나에게 말을 했다. 나는 그저 귀를 기울였다. … 화가는 우주에 관통돼야 하지 우주를 관통하길 원해서는 안 된다”라면서 보는 행위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기술한다. 이러한 역전에서 몸의 감각이 살아나며, 타자와 얽혀 있는 세계가 몸으로부터 와닿는다는 것이다. 상호 공존의 생태적인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하게 나타나는 지금, 그 가능성 역시 몸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각에 과부하가 걸릴 만큼 각종 디지털 기기와 이미지에 몰입한 채 살아가는 상황에서 그 역전을 기대하기란 녹록지 않다. 더구나 최근에는 VR이니 XR이니 하면서 눈 위에 씌운 HMD를 통해 가상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술이 더욱 고도화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전에 가상 세계를 출현시키는 가장 고전적인 장치 중 하나는 단연 극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 그 근원에는 가상 세계가 빚어지는 장소로서의 몸이 있다는 것이 위성희의 관점이다. 가령 그의 작업에서 제시하듯, “레몬의 신맛을 떠올리지 마세요”라고 퍼포머가 속삭이는 순간 이미 몸은 그 신맛을 느낀다, ‘빈 공간’의 연극을 주창한 연출가 피터 브룩의 경우, 전쟁의 상황에서 굶주린 아이들이 연극을 통해 어떻게 먹을거리에 대한 감각을 더없이 생생하게 불러냈는지 언급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실재가 부재하더라도 가상은 마치 실재인 듯 다가올 수 있으며, 이미 인류는 태곳적부터 이러한 메커니즘을 잘 활용해 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신화나 샤머니즘 역시 작동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샤를 스테파노프 같은 인류학자의 연구에서도 암시되며, 나아가 공연예술의 발생 또한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몸에 내재한 이러한 ‘이미 있음’의 차원은 기술적 진보라는 관념을 무색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작업에서 눈꺼풀 혹은 안대라는 커튼에 의해 암전 되면, 조금 전까지 시야에 넣었던 골목의 풍경은 무대가 되어버린다. 관객 옆에서 인도하는 퍼포머의 이야기가 마치 희곡의 지문처럼 삽입되는가 하면, 시각적 허기를 채우려는 듯 관객의 몸에서 활성화되는 입체적 감각들과 만나 실재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게 하는 지점들을 빚어낸다. 작가 미셸 베르나르가 “상상력은 느낌 속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허구가 갖는 신체적 근거를 이 작업을 통해 실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무대막 역할로서의 안대는 다른 한편으로 눈에 바로 덧대어지는 유사점으로 인해 VR 기기의 오랜 버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안대의 사용과 같은 시각의 제거나 최소화는 그 반대의 극한과도 상통하는 게 아닐까. 가령, 김수화의 <메타 헨즈>(2022)에서 안무가는 공연장을 그대로 매핑한 이미지를 VR 기기로부터 주시하면서 공간에 배치된 사물을 옮기는 등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다가, 문득 얼굴에 완전히 밀착되지 않는 기기의 틈새로 감지하게 되는 실재에 관해 언급한다. 사실 꽤 무겁고도 거추장스러운 VR 기기를 착용하고서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을 해본 이라면 그 순간 무릎을 칠 정도로, 그러한 틈새를 종종 의식하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VR 기기를 통한 시각적 환영의 극대화는 가상 세계로 금세 빠져들게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반대급부적으로 몸을 붙들고 실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VR 속의 이미지는 장소 특정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객들의 가변적인 위치까지 포괄할 수 없기에 가상적이며, 실재와의 간극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는 공연자의 VR 기기는 안대나 다름없어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VR을 착용한 이는 관객이 아닌 공연자이며, 관객은 공연자의 설명을 통해서만 그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가상의 최대화에서 의외로 맞닥뜨리는 몸의 감각과 함께, 안무가의 상상력은 또 다른 차원으로 치닫는다. 몸과 결합하여 덧붙여지는 어떤 도구나 기계는 몸의 연장이나 확장이면서도 실은 몸의 제한성이나 취약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안무가는 눈 위에 덧대어진 VR 기기만큼이나 과거의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몸 안에 더해진 금속 보철물에 주목한다. 여전히 기기를 눈에 얹은 채 일종의 사이보그처럼 보이기도 하는 안무가는 렉처 퍼포먼스의 방식으로 이 보철물에 관해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다가 거기에 전류를 흘려보내 파동을 발생시킬 가능성을 언급하더니, 결국은 바다 깊은 곳에서 유영하는 고래의 초음파와 공명하며 함께 춤추기를 꿈꾼다. 더구나 안무가의 몸은 이미 고래와 동기화되어 춤추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보다 아름다운, 타자와의 공존에 대한 상상력이 더 있을까 싶어진다. 또한 그의 춤으로부터, “상상적인 것은 모든 사람의 몸짓의 기초이고 현실의 중심에 있다.”(이자벨 지노 외)는 것을 절감한다.
결국 자본화된 스펙터클로 잔뜩 휘감긴 우리의 삶에서 ‘몸의 순간’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매우 문제적이며, 뜻밖에 주어지는 일종의 선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위성희의 작업에서처럼 고대로부터 결코 퇴화되지 않은 채 잠재된 그 무엇이며, 김수화의 작업에서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담지하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가장 취약함을 노출하지만, 그렇기에 반전과 구제의 여지를 내포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허명진

무용전문지 <몸> 기자를 거쳐 2003년 제11회 무용예술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공연예술지 <판> 편집위원, 국립현대무용단 교육&리서치팀, 남산골한옥마을 웹진 <온> 편집책임 등을 거치면서 무용의 접점을 다변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