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 몸은 오늘도 이동 중

진성선


내 몸이 맺고 싶은 관계

샤르코마리투스라는 희귀난치성 유전질환이 있는 장애인 가족은 늘 사례관리 1순위였다. 동네에서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주변은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교회 목사님은 큰 불행이 찾아온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생활공간과 몸은 언제든 보여줄 준비를 해야 했다. 도움을 받을 준비만 해야 하는 몸이 되는 것 같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다른 대안도 없었다. 친밀함을 주고받는 관계를 원했지만,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주로 일방적으로 다가왔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났다. 내 몸이 누구와 어떻게 만나고, 어디에서 보여주고 싶은지 생각하고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나에게 도움을 준다고만 믿는 사람들에겐 내 몸의 경험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웠다. 장애가 있는 나와 내 가족들은 서로 기대어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상상하지 못했고, 아무리 말해도 증명하기 어려웠다. 불행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웃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장애가 있어도 밝다는 말 속에는 나를 동정하는 마음이 깔려있었다. 내 몸이 맺고 싶은 관계를 더 지속하기 위해서 나는 장애여성공감(이하 공감)이란 운동 단체의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몸을 이동시키고, 다르게 써보기도 한다. 이 글은 장애가 있는 몸으로 살아가는 나의 관계와 동료, 연대와 돌봄, 실패를 통해 계속되는 이야기다.

서로 돌보는 연습 중인 나의 몸

주도권을 갖는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활동한 지 8년이 다 되었지만 자주 실패한다. 물론 이 실패가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공감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동정과 멀어졌지만 내 몸의 다른 습관을 보게 되었다. 장애가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같은 장애인인 동료를 대상화하고, 장애 여성으로서 차별 경험을 피해로만 말하는 나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이하 춤허리)의 동료들도 이곳에 와서 다른 장애 여성들을 통해 자신을 마주하는 것 같다. 그래서 끝없이 말하고 토론하려고 한다. 갈등하기 때문에 상처받고 나와 동료를 마주해가는 지난한 시간을 같이 견디기도 한다. 이 시간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자고 지지하고, 때로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우리부터 먼저 변해보자고 말한다. 그래서 나와 동료들은 자주 실패하고, 실패를 겪으며 쌓아온 시간은 또다시 활동의 동력이 되었다.

“네가 더 열심히 해야 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해” 착한 장애인이 되려고 노력한 시간만큼 익숙한 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누군가의 보조를 거절하는 덴 용기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나를 챙기려고 먼저 다가올 때 단호히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의 위치로 관계 맺고 싶었다. 당장 몸의 보조를 받는 것보다는 내가 왜 그랬는지 소통할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 장애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매사에 장애 때문이라고 탓하지는 말자고 한 다짐은, 바빠서, 힘들어서 등 여러 핑곗거리를 찾아 멈춰 있었다. 동료들과 느낀 몸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기 충분했다. 그래서 업무를 주도적으로 하지 못할 때 장애와 그로 인한 느린 속도를 문제 삼았고, 비장애인처럼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우선시하며 함께하자는 동료의 신호가 들리지 않았다.

관계가 ‘나빠질까 봐, 실수할까 봐’ 몸이 굳어지지만, 그냥 넘어가는 순간 동료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친절한 관계 말고는 나에게 어떤 역할도, 갈등도 기대받지 않는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장애 여성으로서 한순간도 무시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라는 동료의 말을 계속 새긴다. 우리가 공연을 준비할 때 얼마나 요령 있게 보조를 하는지보다 서로의 말을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긴장을 주는 관계가 왜 필요한지를 말이다. 물리적으로 몸을 보조하는 것만이 돌봄이 아니다. 동료와 회의하고, 역할을 나누고, 활동 지원을 요청한다. 멈춰 있다가도 나아가는 상황과 맥락, 관계와 동료에 따라 돌봄의 방식을 더 고민하는 것, 매일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로를 돌보기 위한 돌봄을 연습 중이다. 돌봄에 대한 지원이 탄탄하지 않은 사회 속에서 극복도 맘대로 되지 않는 내 몸을 탓하게 될 때, 나는 돌봄에 대해 더 생각할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몸, 실패해도 앞으로 가는 몸

2022년 10월 28일 나는 생애 첫 삭발을 했다.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를 위한 삭발투쟁이 130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몇 달간 삭발할지 말지 수십 번 망설였다. 동료들은 안전함을 원했던 몸을 변화시킬 기회가 될 거라고 했다. 동료들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삭발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의구심이 드는 한편, 나에게 어떤 힘을 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투쟁 당일, 삭발을 할 때는 별로 떨리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커다란 사명감으로 결정한 건 아니어서였을까. 그보다는 먼저 삭발한 옆의 동료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현실에 화가 치밀었다.

삭발하고 나서야 머리카락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돌아봤다. 내 몸은 돌봄이 필요하기에,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었다. 나 혼자서는 머리를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보조받기 편하게 잘라야 했다. 어느 시기에는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머리를 길렀지만, 활동 지원사의 눈치를 보는 몸은 원하는 보조를 참고 줄이고 있었다. 이 경험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삭발하고 나니 정작 머리카락을 기르고자 했던 이유가 장애 여성으로서 여성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단 걸 깨달았다. 솔직히 머리를 기를수록 나 역시 여성이 되는 것 같아서 위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삭발은 해방감을 주었다. 머리가 짧아지면서 보조를 요청하기가 더 수월해졌고, 여자다운 모습 외에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삭발은 내가 보조를 요청할 때도, 옷을 고를 때도 내가 계속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려줬다. 다시 이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실패할 기회를 얻고 연습해 보는 시간은 전보다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주었다.

동료들과 이동하며, 어색하게 움직이며

춤허리에선 몸을 돌보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PT나 필라테스를 각자의 장애와 몸에 맞게 변형해서 워크숍을 했던 경험이 있다. 헬스장은 장애 여성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 공간이었고, 갈 수 있는 곳은 병원, 재활센터 복지관뿐이었다. 실제로 재활도 몸의 기능이 더 좋아질 수 있는 사람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중증 장애인의 몸은 들어가기 어려웠다.

작년 몸이동(異動) 프로젝트에선 요가 워크숍을 하면서 시간을 충분히 갖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부위별로 느껴지는 감각에 최대한 집중했다. 요가에서 이러한 과정을 이완이라 하는데, 연극 연습을 하는 것과 유사했다. 숨을 쉬며 내 몸의 상태와 감각들에 집중할 때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 갈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가만히 있어도 되나? 답답하기도 했다. 장애를 갖고 있는 몸은 느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무언가를 계속하기 위해 움직인다. 내가 하기 어려운 요가 동작은 보완할 수 있는 도구를 활용했는데, 평소 내가 앉아 있을 때 다리를 높은 베개 위에 올려놓거나 몸의 각도를 조절하기 위해 쓰는 다양한 쿠션 등을 사용하는 방법과 똑같았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가며 나의 몸에 편안한 방법을 계속 찾던 감각이 요가와 연결되었다.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내 몸이 더 안 좋을 거라고 예상하지만 오히려 비장애인 동료보다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곧은 허리를 발견했다. 뇌 병변 장애 여성 동료는 강직되는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것보다 펼치는 동작을, 근육이 약한 나는 안으로 모으는 동작이 필요했다. 서로의 몸이 다르기에 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서로의 몸을 이해하게 되었다. 몸이동 프로젝트 과정 중 제주로 이동하기도 했다. 몸은 신기하게도 낯선 곳으로 이동하자 관계를 선명히 보여주었다. 일상에서 동료의 몸을 궁금해하지 않는 몸은 즉흥극에서 동료의 충동과 움직임에 따라가지 못했다. 끝없이 펼쳐진 제주 바다를 핑계로 몸을 숨기고 싶었다. 잘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나의 마음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로 실체 없이 떠돌았다. 1인 극은 망했다.

제주 가시리로 이동했다. 요가나 즉흥 퍼포먼스를 할 때 휠체어에서 내려오는데에는 두세 명의 활동가가 조력한다. 서로의 몸을 최대한 밀착시키고 호흡을 맞춰야 하는 순간이다. 조금씩 가빠지는 동료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는 동료의 수고와 배려를 알기에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은 줄인다. “허리를 받치고 양쪽 다리를 잘 잡아주세요”라며 내 몸을 솔직히 꺼내놓는다. 서로의 몸에 집중하며 합이 딱 맞아지는 순간. “제주도 음식이 건강해서 오늘은 좀 가벼운 거 같네요” 농담을 툭 던지며 긴장을 내려놓는다. ‘평평한 땅에서 걸어 다녀도 절뚝거리면서 걷는데 모래라면 발이 숭덩숭덩 빠지고’ 꼿꼿이 걸으려고 노력했던 몸이 제주의 모래 위에서 자유로워진 동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색하지만 모두와 함께 이동했기 때문이라 했다. 동료의 몸이동 경험을 공명하며 조심스럽고, 두려운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서로의 몸이 만나는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실체없이 떠도는 마음에 대해 말하기보다, 사소해 보이지만 입안에 맴돌고 있는 말을 꺼내고 싶어졌다. “손은 아래로 축 늘어져 뼈가 없이 덜렁거리고.”라며 내 몸을 내가 있는 그대로 표현할 때 빵 터지는 순간의 짜릿함을 느낀다. 장애인의 몸을 통해 차별하는 구조에 분노하는 것만큼, 갑작스레 건네는 장애 개그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색한 감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더 나누고 싶다.

활동가와 배우 사이에서, 의존하며 움직이기

제주로 이동하며 새로운 공간에서 활동 지원을 주고받는 몸, 자연과 만났을 때 압도되는 몸, 갈등이 생기는 몸을 경험했다. 또다시 멈춰 있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하지만, 옆에 있는 동료를 살피고 내일 더 해보자고 결단한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입안에 맴도는 말을 꺼내고 그 감정을 따라 함께 움직이는 즉흥극은 충동대로 욕구대로 움직여보는 연습이었다. 계속 실패하는 몸을 마주하면서 눈치 보거나 위축되지 않고, 오늘부터 다시 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긴 시간 동안 동료에게 기대어 왔고, 나 또한 기댈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 실수할까 봐 불안한 마음을 서로 인정해야 다른 이야기들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활동가이자 배우로서 ‘이쯤 되면 잘해야지.’ 조급해지는 마음을 갖는다. 오늘도 나는 실패한다. 나와 갈등하고 동료에게 의존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눈치 보던 내 몸은 다른 관계로 이동할 수 있을까?

진성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활동지원현장에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합니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여성입니다.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 동료들과 관계맺고, 갈등하며 익숙한 몸과 삶의 변화를 만드는 과정을 연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