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표준형 어린이

김지완


  고층 아파트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승강기 내부 버튼의 위치와 배열을 본다. 요즘은 세로형 버튼과 가로로 된 장애인용 버튼이 함께 놓인 곳이 많지만, 과거에 지어진 아파트는 그렇지 않았다. 세로형 버튼만 한쪽 편에 놓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것의 위치를 여덟 살 때 처음 인식했는데, 그 무렵 가족이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13층 꼭대기 층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래 평균 키를 한참 밑도는 작은 체구의 여자애였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내 키로는 두 번째 줄 맨 꼭대기에 있는 13층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창피해서 한동안 그 사실을 숨겼다.
  4층을 누르는 아저씨가 있고 12층을 누르는 아줌마가 있으면 12층에서 내려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갔다. 6층을 누르는 언니가 있고 11층을 누르는 할머니가 있으면 11층에서 내려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갔다. 3층을 누르는 아저씨와 단둘이 타게 되면 그냥 내 손이 닿는 제일 높은 층을 눌렀다. 집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이런 방식을 썼다.
  “너 꼭대기 층 사는 애 아니야? 왜 10층에서 내려?”
  어느 날 10층에 사는 언니가 습격처럼 질문을 날렸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언니는 당황했다.
  “세상에…. 그럼 오늘은 내가 눌러줄게.”
  “근데 저 그냥 9층에서 내려서 뛰어 올라가면 되는데요? 13층까지 1분 만에 갈 수 있는데요? 별로 안 힘든데. 진짠데요.”
  나는 과장되게 거절했다. 어린이의 영문 모를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건지는 몰라도 언니는 13층 버튼을 눌러주지 않았고, 나는 별일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한 채 문이 열리자마자 비상구로 뛰어가 축지법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한테 이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쪽팔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승강기로 데려갔고 버튼 앞에서 까치발을 드는 내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껄껄껄 껄껄껄 막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물론 그냥 웃기만 하지는 않았고 집에서 망치와 판자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었다. 조그만 상자같이 생긴 발판이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승강기에다 발판을 의기양양하게 내려놓았다.
  “올라가 봐라.”
  할아버지가 만든 발판과 승강기의 모서리가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다. 나는 그게 굉장하다고 느꼈고,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지금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할아버지, 나는 1층에서 누를 때 13층 버튼이 안 닿는 건데…?”
  “올라가면 이제 닿는다. 올라가 봐라.”
  “여기는 13층 엘리베이턴데…? 나는 이거를 1층에 놓고 싶은 건데…?”
  여덟 살의 나는 층마다 승강기가 각 한 대씩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논리적으로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아무튼 그때의 내 머릿속에서는 승강기가 층층이 있는 집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발판은 ‘13층에 있는 승강기’가 아니라 ‘1층에 있는 승강기’에 놓여야 하는 거였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부터는 발판에 올라가 13층 버튼을 수월하게 누를 수 있었다.
  “엄마야, 키가 너무 작아서 안 닿는가베? 니 얼른 커야 되겠다.”
  그러나 발판에 올라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한두 마디씩 얹는 어른들은 잊을 만하면 나타났고 나는 그때마다 번번이 마음을 다쳤다. 학교에서 크고 작게 속상한 일이 있었던 날에는 그냥 예전처럼 아무 층에서나 내려 비상구 계단을 이용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발판을 마치 절교한 친구를 바라보듯 낯선 표정으로 바라보는 날들이 있었다. 나는 이 일련의 일들이 다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탓이라고 생각했다. 표준, 평균, 정상, 일반과 같은 단어들이 단어와 그 뜻을 채 알기도 전에 관념으로 내 안에 먼저 자리 잡았다. 내가 그것들에 못 미치는 어린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무렵 또 하나의 딜레마가 있었다. 발판을 외면하고 발판을 쪽팔려 하는 일이 그것을 만들어준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할아버지를 쪽팔려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다리에 마비가 온 뇌 병변 장애 2급이었다. 꾸준히 재활운동을 한 덕에 그는 비장애인보다 가구나 기계를 훨씬 잘 조립했고, 택시운전사 경력으로 운전도 무척 잘했으며, 지금도 집안 곳곳을 보수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탁월한 장인과도 같다. 나는 가끔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교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나를, 정확히는 나와 내 할아버지를 발견할까 봐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고 조수석에 눕다시피 했다. 할아버지가 한 번은 왜 그런 자세로 있느냐고 물었다. 이게 편해서. 성의도 없고 자신도 없는 내 대답에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알아차렸을까 그때도 두려웠고, 사실은 지금도 두렵다.
  나도 할아버지도 표준이 아니라는 생각…. 발판이 쪽팔린 것과 할아버지가 쪽팔린 것과 내가 나라서 쪽팔린 것이 도무지 구분되지 않았다. 나쁘고 어리고 구린 나를 지금까지 기억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달리 어떡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승강기에는 가로형 버튼이 없는데, 학교에서는 “야 이 장애인아!”를 욕으로 쓰는 아이들이 존재하는데, 그 날것의 세상에서 어린이는 나와 발판과 할아버지의 장애를 몽땅 미워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작은 키를 쪽팔려 하는 어린이는 할아버지의 장애를 쪽팔려 하는 어린이가 된다. 자신의 작은 키를 쪽팔려 하는 어린이는 다른 친구의 쪽팔린 점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표준과 평균과 정상과 일반같이 하얀 단어로 약자의 삶을 침투하고 독처럼 퍼져나간다. 몸에 대한 모욕이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다양한 층위의 약자를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른이, 교육이 어린이에게 말해줘야 한다. 쪽팔린 몸이라는 건 이 세상에 없단다. 정말이지 그런 건 없단다.
  좋은 어른이란 발판에 올라 버튼을 누르는 어린이를 함부로 귀여워하는 대신 장애인용 버튼이라는 시스템을, 그 시스템의 부재를 생각해낼 줄 아는 어른이라고 믿는다. 약자를 위한 시스템의 가장 멋진 점은 그것이 다양한 층위의 약자를 순환한다는 것이다. 가로로 된 장애인용 버튼을 키 작은 어린이와 장애인이 함께 쓰듯이.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승강기를 장애인과 노인과 임산부가 함께 쓰듯이. 어느 날 발목을 접질린 비장애인이 장애인용 승강기를 타면서, 새삼스레 승강기의 존재를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리듯이.
  나는 할아버지의 새하얀 기아 크래도스 초기형 자동차를 타고 등교하던 어린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오늘은 계단을 뛰어오르지 말고 발판 위에 올라가 승강기 버튼을 눌러보라고. 발판을 만들어준 할아버지한테는 감사하되 버튼 위치를 이렇게 만든 승강기 업체를 향해 속으로 침을 뱉어버리라고. 표준형 어린이 같은 건 그때도 지금도 없다고.

김지완

동인 <문어뱅스> 소속입니다.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씁니다. 2023년 마해송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24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어린이에게 잘 보이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 저도 좀 끼워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제가 먼저 재미있는 글을 들고 기웃기웃하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