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며 몸을 꾸릴지라도
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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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쯤 이태원 언덕을 지나가는 길에 누군가 등짝을 쳤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이가 명랑하게 눈을 맞췄다. 누구세요? 나야! 제도권 교육을 받던 시절 만난 친구였다. 당시에는 게이로 알고 지냈는데, 십수 년 전 트랜지션을 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
상대의 폭소. 민망한 마음에 이쪽도 실소를 터뜨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니. 정작 궁금해야 했던 건 네가 그동안 살아온 얘기가 아니었을까. 당시엔 안부도 연락처도 지금 쓰는 이름도 제대로 묻지 못하고 서로 갈 길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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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를 반대하는 강력한 논리 중 하나는 이들이 후천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다. 섭리대로 태어났지만, 외부 영향을 받아 동성애자가 되었고 성별을 바꾼다는 시나리오다. 이런 접근은 동성애와 성별 불일치가 불우한 환경 속에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규범과 반목하고 동일시되지 못한 이들이라는 설명으로 이어지면서 ‘퀴어는 실패한 존재’라는 불행 서사의 서막이 된다. 일군의 사람들은 동성애에 ‘전염된’ 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불행해지기 전에 문란하고 불온한 싹을 잘라야 한다고 말한다. 하여 ‘전환치료’는 소위 ‘사랑’으로 다시 읽힌다. 이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의 교리뿐 아니라, 동성애와 성별 불일치를 정신질환의 항목으로 두어온 의학계의 오랜 역사를 지탱해온 지독한 논리다.1)
이에 성소수자도 응전한다. 대표적으로는 그것을 왜 우리에게만 묻느냐는 항변이 있다. 이성애와 남녀로 갈라치는 성별 이분법에 대해서는 왜 당연하게 생각하는가. 그것 또한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규범화된 (에이드리언 리치의 유명한 진단처럼) 강제적인 이성애주의가 아닌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감각하는 이성애 기반의 성별 역시 강력한 재생산 제도와 법에 의해 사후적으로 의미 부여된 것 아닌가 말이다. 이성애도 당연히 거듭된 역사 속에 뼈와 살처럼 되어버린 담론의 산물이라는 인지는, 최근의 과학적 연구에도 주요한 변화로 개입하는 듯 보인다.
가까운 과거까지 종종 소개되었던 연구 중에는 ‘동성애 유전자’ 설이 있다. 그것은 동성애가 후천적으로 형성된다는 주장에 대한 대항 논리로도 많이 인용된다. 한데 동성애 유전자가 없으면 동성애자가 될 수 없는 건가? 동성애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성애자로 살아간다면 그의 존재는 흔들리고 마는가? 동성애자로 정체화한 남성이 성적 끌림을 느끼는 이가 트랜스젠더 남성이라면, 혹은 성별 구분에 저항하는 누군가라면, 유전자 입장에서는 조금 골치 아프지 않을까.
최근의 과학은 단일한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고 말한다. 미국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 등이 참여한 국제공동연구진이 2019년 8월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 〈대규모 GWAS를 통한 동성 간의 성적 행동의 유전적 구조에 대한 통찰(Large-scale GWAS reveals insights into the genetic architecture of same-sex sexual behavior)〉2)은, 영국 바이오 뱅크(UK Biobank)와 미국 유전자 분석업체 23앤미(23andMe)의 47만 명분 게놈 자료를 대상으로 동성애의 유전적 요인을 추적하고 분석한다. 연구진은 동성애 성행동과 통계적으로 관련성을 보인 5개의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는데,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동성 성애적 행동에 8~25% 정도의 기여를 보이지만, 성적 지향을 결정하는데 미치는 영향은 1%를 밑돈다고 한다. (동성과 섹스하고 사랑의 감정을 나눈다고 해서 모두가 동성애자로 정체화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통계에 기반하는 분석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개념부터 위계적으로 구성되고 사회문화적으로 역사화 된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원적으로 젠더와 섹스를 나누는 이성애 가족의 체제는 국가와 산업의 근간으로 받들어지면서 자연적인 본성이자 규준이고 체제이자 사회의 대기를 구성한다. 적어도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자신들의 실존을 던져 파헤쳐 온 시도들은, 지금의 ‘자연스러운 것’이 어떻게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 헤집으며 그것이 어떤 담론 체계로 구성된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했던 점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연구는 해당 결과가 성소수자 시민권이 어느 수준 보장되는 유럽과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점을 강조하며, 성소수자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사회와 제도적으로 지지하는 환경이 결괏값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동성애와 성별정정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국가에서, 정체성을 알아도 숨겨야 하고 정보도 유통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같은 실험을 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 여기에 더해서 연구는 완전히 선천적인 동성애 기제의 발견 여부와는 별개로, 동성애를 병리화하고 치료할 대상으로 삼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당부를 놓치지 않는다.
과거 동성애의 선천성을 주장하는 접근에는 유전자 외에도 뇌 구조와 성호르몬, 면역 등의 접근이 있지만, 이들 또한 온전하게 입증하지는 못했다. 이는 몸에 새겨진 영구적인 유전자의 개념이 사회에서 규범화된 행태와 시간에 따라 고안되거나 사장되는 정체성의 이름과 일치하기 어려움을 증명한다. 젠더와 성애의 운명 역시 유전자가 점지할 수 없으며, 유전자 자체에 대해서도 특정 유전자가 단일하고 영구적인 성질을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근래의 후성유전학을 참조하면 DNA 속성이 외부의 누적되거나 변화해 온 위계를 학습하면서도 이를 다르게 실천하고 저항하면서 (재)창안한다고 말한다.3) 몸이 유전자의 설계를 체화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현실의 관계와 위계, 우연과 변칙에 던져지는 것을 안다면, 하여 욕망 또한 재구성될 수 있음을 안다면, 선천적으로 존재가 결정된다는 주장은 불가능에 가까울뿐더러 생애의 복잡한 역동을 간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몸을 탐구하고 욕망과 관계를 실천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기존의 규범을 강고히 하며 몸의 양태와 행위에 위계를 두고 범죄화하기에 앞서, 그가 자신을 설명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상해와 손상, 차별과 낙인 등의 위해를 겪지 않도록 사회·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지금까지 작동하는 이원론적 위계와 구분을 쉽게 폐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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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성기의 생김새로 가르자니 물리적 수술이 가능한 현실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생리나 임신·출산 능력으로 판단하자니 임신과 생리를 할 수 없는 여성들의 존재를 배제하게 된다. 해서 기준은 분자 단위로, 호르몬과 염색체의 차이로 선 긋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구분은 완전할까. 사람의 생김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택일해서 말할 수 있을까.
어디든 변칙은 있고 차라리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 세계에서 성별을 판별하는 기준은 대개 성기의 생김새로 이뤄진다. 성별 정정 판결 역시 최근에야 성별 지정 수술, 성기 재건 수술을 기준으로 삼지 않은 사례를 인정한다는 판례가 나오지만, 이는 너그러운 재판관의 개인 재량에 의존해야 한다. 최근 대법원은 성별 정정 신청자에게 성전환증 환자 진단서와 성전환수술 여부를 증명하는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예규의 조항을 폐지하는 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4) 하지만 당사자의 주도적인 성별 정정을 위한 제도의 변화와 사회적 기준을 요구하는 일이 최종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일례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끊임없이 물으며 ‘젠더 무법자’를 자처하는 트랜스젠더 활동가 동료는 주변으로부터 그럴 거라면 트랜지션을 왜 했느냐는 물음을 끈질기게 받는다고 말하며 그때마다 이렇게 응대한다고 전한다.
‘그거야 저는 여자니까요.’
이원론적 성별이 누적된 역사와 담론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이원론적 구분이 당대를 살아가는 몸과 영혼을 오랜 시간 구성하고 구속해왔음을 누락하기 쉽다. 최근 소개되는 젠더 교육이 성별 구분에 대해 이분법보다 스펙트럼에 가깝다고 주장할지라도, 기존의 구분은 태어나기 전부터 공기처럼 일상이 되었고 태어날 때부터 체화되었다. 내가 아무리 나의 성별과 성적 지향을 선택할지라도 기존의 제도와 사회적 장치들로부터 자유롭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규범은 항상 일관되기만 할까. 규범에 예속된 이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단일한 삶에 끼워 맞추기만 할까. 가령 현실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각기 단일한 기준과 규준을 갖기도 어려울뿐더러, 그에 획일적으로 동일시하며 살아가기도 어렵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시스젠더의 권력을 부수고 이원론적 성별 분리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면서도 누군가는 지긋지긋한 이원론적 성별 체제 안에서 규범적 성별을 택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적지 않은 이들은 주어진 성별 구획의 안팎에서 저만의 비규범적 젠더 양식을 창안한다. 규범에서 어긋난 성별의 양태와 습속을 수행하는 삶은 겪지 않아도 되는 불편을 일상에서 몸으로 감내하면서도, 제 몸을 설명할 언어를 찾아 배우고, 제도와 타협하거나 불화하며 몸의 질서를 갱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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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디에(Xiyadie)는 스스로 독학한 중국 전통 종이 공예 기법을 이용하여 섹슈얼리티를 시각화한다고 근간에 국내에 소개되는 작가다. ‘시베리아 나비’를 뜻하는 이름처럼 그가 사용하는 종이는 언제라도 찢기거나 오염되고 훼손되기 쉽고 열과 습도에 변형되기 쉬운 취약한 질료다. 하지만 그만큼 조형과 장식이 용이하며 섬세한 패턴과 형상을 조형할 수도 있다. 종이를 몸으로 은유할 수 있다면, 시야디에가 오리고 그리는 몸은 실루엣을 따라 제 본모습을 감출 수 있고 감춘 채로 드러낼 수 있으며, 몸의 윤곽이 사물과 풍경의 경계에 혼재될 수도 있다. 윤곽으로 출현하는 종이는 구분의 강박을 지우고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몸의 형상이자 풍경을 잇는가 하면, 무대와 바탕 면을 하나의 연결망으로 평평하게 이으며 서사의 깊이와 평면의 장식적인 화면을 품는다. 각각의 실루엣은 몸을 숨기는 동시에 출현시키며, 몸의 감각적 촉수들을 넝쿨과 줄기, 건물의 창살과 밧줄에 연결한다. 수직의 벽에 매달린 종이는 물감을 머금어 어디에 긴장과 흥분이 집중되는지 가리키는가 하면, 오려낸 형상과 물감의 농도에 따라 정체를 가늠하면서도 감춰둔 서사의 가능성을 상상케 한다. 마을 사람들과 가족, 공안의 감시를 피해 몸을 숨기지만 숨은 채로 부대끼는 이들은 전통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적극적으로 제 성애적 쾌락과 몸들을 표현한다.
작가의 가위질을 통과한 종이의 형상은 작가의 자전적 생애 속에 그의 성애적 판타지와 엮이며 작업마다 (비)현실적 풍경과 사물들을 출현시키고 몸의 형상뿐 아니라 몸과 몸이 엉키는 형태 또한 변주를 시도할 수 있다. 종이의 기예는 나아가 종이를 투과하며 관객의 감수성에도 연결된다. 배경과 엉키는 중에도 누군가의 생식기와 눈빛, 손길과 스킨십은 처절하리만큼 작고 하찮은 모습으로, 하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촉수를 뻗는다. 종이처럼 구겨지고 찢어질지 모르지만, 얄팍한 물성은 상황에 따라 몸을 접었다 펼치고 숨겼다 드러내며 언제라도 들키고 손상될 수 있는 환경에도 쾌락과 생존을 잇는다.
이태원에서 나를 알아봐 준 친구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논 시절이 있다. 우리는 미(성년)자였고 대개는 게이로 취급되었으며, 소위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먼 ‘끼순이’들이었다. 만나면 외로움과 연애의 욕구를 토로하고, 시중에서 ‘여자 같다’고 칭하는 말투와 태도를 뽐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은 각자의 사회생활과 다른 준거집단에 소속되면서 조금씩 멀어졌다. 누군가 성별 정정의 길을 택하며 제 삶을 걸어 나가는 동안, 다른 친구는 군대를 다녀오고 외모를 가꾸면서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남자의 모습을 체화해갔다. 우리는 같이 놀던 친구였고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마다 다른 영역의 질서를 체득하며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갔다. ‘젠더퀴어’나 ‘논바이너리’라는 개념이 당시에도 익숙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법으로 몸을 표현하고 삶의 궤적을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단어만으로 몸을 지탱할 수는 없지만, 생소한 개념들이 집단을 이루고 언어와 문법과 일상을 그린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는 다른 생애 주기를,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회한에 젖은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글쎄.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작가인 댄 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3주기가 되는 2024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를 가졌다. 《댄 리: 상실의 서른여섯 달》(2.16-3.7)에서 작가는 전시장 공간을 숙성과 소멸로 채워 넣는다. 국화 다발로 매듭을 엮고, 삼베와 면포, 짚과 옹기를 이용해 숙성의 공간을 만든다. 바닥의 흙에서는 새싹과 버섯이 자라고 옹기에는 누룩이 발효한다. 부패하는 유기물과 발효하는 미생물은 생과 사를, 소멸과 탄생의 순환 시스템을 그리면서도 애도를 위한 예식의 무대를 펼쳐놓는다고 전시는 설명한다. 숨을 잃어가며 먼지처럼 부스러지는 꽃의 다른 편에는 울금으로 천을 염색해 유기물과 무기물의 경계를 흐린다.
전시는 해석상의 비약을 자제하는 모습이지만, 필자는 미생물의 작용을 호르몬과 유전자에 빗대고 싶었다(너무 손쉬웠기에 비유를 피한 것일까, 퀴어 당사자성이 강한 해석을 경계한 것일까). 사물을 부식시키고 시들게 만드는 효모와 곰팡이 등의 미생물은 생사의 틈새에 번성하며 경계 자체의 생태계를 펼친다. 미생물을 주입시켜 사물의 성질을 변형하는 과정은, 호르몬을 통해 몸의 형태와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유비하게 만든다. 그것은 구분된 몸의 정의를 환기하면서도 동시에 부식시키며 교란하는 변형과 변칙의 실천을, 세대에서 세대로 제 특성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안팎의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유전의 궤적을 떠오르게 한다.
변형과 숙성, 마모의 순환에 노출된 삶은 성과 쇠의 매듭으로, 미시적인 생화학적 작용들이 묶이고 풀리는 매듭들의 타래로 상상을 싹 틔울 수 있다. 상실과 망각의 시간은 그저 부정성으로만 점철될 수만은 없지 않을까. 정체성에 똬리를 틀면서도 언제고 정체성을 끌어안고 다른 자리를 점하거나, 정체성으로부터 다른 도약을 시도하는 몸을 그린다면, 언제고 변형하고 손상하거나 망가질 수 있을지라도 그 과정에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의 몸은 부지불식간에 당신과 매듭을 엮어온 모습으로 화면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친구가 내려친 등짝은, 반가움에 어색함도 불사했을 이의 즉흥적인 한방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저만큼 멀리 가버린 생애의 좌표가 한순간 접혀 조우한 신호는 아닌지, 그러니까 변화를 거듭해온 우정의 신호가 지난 시간의 그리움과 변화를 하나의 점으로 합쳐낸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1)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질병분류(ICD) 표에서 동성애를 1992년에, 트랜스젠더를 2018년에 삭제했다. 이미 그 전에 미국 정신의학회(APA)는 정신질환 편람(DSM)에서 1987년 동성애를 삭제했다.
2) 해당 연구는 다음 링크에서 초록을 찾을 수 있다.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at7693
3) 후성유전학에 대한 설명은 데이비드 무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정지인 옮김, 아몬드, 2023.에서 참고할 수 있다.
4) ‘대법원,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에 수술 확인서’ 지침 폐지 검토’, 법률신문, 2024. 1. 8.
https://www.lawtimes.co.kr/news/194745
남웅
미술·시각문화 비평과 인권 운동을 한다. 2011년 「동성애자 에이즈 재현에 관련된 논의」를 주제로 제4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미술비평 부문에 당선되었고, 2017년 「오늘의 예술콜렉티브-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보지만, 얼마 동안 빛이 있는 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로 제 2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현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와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소수자난민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술 기관과 잡지, 언론과 웹진을 비롯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미술, 문화, 사회 분야의 글을 기고한다. 근래 ‘『앵콜』(토탈미술관, 2022)’, ‘『범람하고, 확장하는 Q』(나환 아카이브, 2022) 출판에 참여했고, 최근에는 ‘당신을 지지한다’는 문장의 곤란함에 관하여'(세마코랄, 2022), ‘쾌락의 열병, 커뮤니티라는 그을음을 따라- 퀴어 미술 산보하기'(행성인 웹진, 2023.5) 등의 원고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