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되기

강혜빈


귤 종류의 하나인 오렌지는
3.2 킬로그램의 튼튼한 한국인으로 태어났다
둥글고 견고함 무겁고 부드러움을 겸비한 오렌지는
21세기에 태어나고 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태어나자마자 세계의 착잡함을 알아버린
오렌지의 꿈은 다름 아닌 자연사自然死였다
오렌지는 오렌지를 낳은 오렌지들의 첫아이였으며
오렌지 아래로 동생 셋이 있었으나
둘이 병들어 죽고 하나는 살아서 우애가 좋았다
오렌지는 울퉁불퉁한 껍질과
축축한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중성이었으나
때로는 활짝, 나비의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푹 익은 마멀레이드가 되어보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살뜰한 연인이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이
택배 기사 혹은 파일럿이
사소한 낑깡이 되기도 했다
괄호 열고
오렌지 낯설게 발음하기
괄호 닫고
물 한 모금
두리번거리다 배를 긁다
의식적으로 침 삼키기
의식적으로 눈 깜빡이기
의식적으로 혓바닥의 위치 느끼기
의식적으로 인간처럼
괄호 열고
오렌지 마침표
오렌지 쉼표
오렌지 느낌표
오렌지 물음표
괄호 닫고
침묵, 침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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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 아니오

심장의 근육은 불수의근
마음은 심장 속에 있지 않고
현관 앞에 내다 버린 택배 상자 속에 있다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 뚜껑 속에 있다
비행기 화물칸에
아내의 사랑스러운 이마 위에
오렌지의 몸으로 산다는 건 말이지
오렌지만 알 수 있어
기분이 오렌지할 때는
지도를 펼쳐 놓고 모르는 가게에 점을 찍는다.
이방인의 마음은
이방인만 알 수 있어
혼자 사는 사람의 마음은
혼자 사는 사람만 알 수 있어
딱 오늘 하루만큼의
딱 한 사람 여분의 정직한 외로움
오렌지 주스가 되어서
오렌지 잼이 되어서
오렌지 껍질 설탕 절임
오렌지 케이크 소르베를 채운
오렌지 지브레
오렌지 크림 케이크 글레이즈드
오렌지 세그먼트가 되어서
나의 쓸모를 고민하다
진지해지기 전에
아무렇게나 오렌지.
단지 소심하고
단지 사려 깊은
이상한 오렌지 되기.

강혜빈

뉴노멀이 될 양손잡이. 낮에는 청소년들과 국어 수업을, 밤에는 타로와 복싱을 한다.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 『미래는 허밍을 한다』, 『밤의 팔레트』,『어느 날 갑자기 다정하게』 외 다수. 사진작가 ‘파란피 PARANPEE’로 활동 중이며, 빛과 컬러를 중심으로 이미지를 발명하고 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불문학을 배웠다. 서울문화재단 2021 ‘창작집 발간 지원사업’ 기금을 수혜했으며, 첫 책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KO 2020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