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zine-vol2-1
여는 글
웹진 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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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 우리의 몸
문화살롱 5120이 두 번째 웹진 ‘#몸’을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 문화예술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문화예술은 우리의 몸을 떼어 놓고서 이야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개개인에 특유한 것이자 모두가 다른 것이기에 다양성 속에서 이야기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서 웹진 ‘놀’ 편집부는 우리 사회에서 몸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을 이번 호에 담고자 총 8인의 필진을 선정, 섭외하여 이번 기획호의 원고를 부탁드렸습니다.
‘다른 몸들’의 대표 조한진희의 ‘몸과 질병 서사’는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 전제하는 건강한 몸이라는 기본값 속에서 타자화되는 몸을 돌아봅니다. 필자는 바쁜 현대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이 만성질환자의 시대라 할만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에 건강중심사회가 소외시키는 우리의 몸을 복권하고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바꾸자고, 아파도 괜찮은 사회를 함께 만들자고 요청합니다. 무용평론가 허명진은 감각이 ‘몸의 순간을 획득하는 역설적 차원’에서 우리가 당연하게만 생각하는 물리적 신체기관과 감각과의 연결을 해체할 필요에 대하여 논합니다. 그에게 우리의 몸은 “레몬의 신맛을 떠올리지 마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그 신맛을 느끼는, ‘이미 있음’의 차원을 담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몸의 특성은 “기술적 진보라는 관념을 무색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러한 필자의 시선을 통해 코로나 19 이후 가열차게 논의되었던 메타버스 세계의 몸이 처음 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의식이 언제나 가상의 메커니즘을 활용해 왔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미술평론가이자 인권활동가인 남웅은 당연하게 여겨 온 신체적 특징에 근거한 성별의 구분이 오늘날 어떠한 담론 속에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원론적 성별의 고정관념 속에서 배제되는 자들의 몸에 관하여 “기존의 규범을 강고히 하며 몸의 양태와 행위에 위계를 두고 범죄화하기에 앞서, 그가 자신을 설명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상해와 손상, 차별과 낙인 등의 위해를 겪지 않도록 사회·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광화문에서 이원론적 성별의 이분법에 대항하고 젠더의 분화된 스펙트럼을 공론화하고자 했던 이들에 가해지는 폭력에 가슴 한쪽이 시큰했습니다. 그들을 지지하고 연대할 단어를 선사받은 것에 고마운 마음입니다. 동화 작가인 김지완은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어린이의 몸에 주목합니다. 하등 불필요하며 독과 같은 사회적 우열을 만들어 내는 ‘표준’이라는 개념을 문제 삼으면서 말이죠. 작가가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픈 한 마디 “표준형 어린이 같은 건 그때도 지금도 없다”는 말은 어릴 적 어느 순간의 저에게도 여러 번 필요했을 말입니다. 이번 웹진에는 장애예술인 창작거점 공연장으로 2020년 건립된 ‘모두예술극장’의 이야기 또한 실었습니다. ‘장애’는 단순한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라는 천명에서, 또한 이것이 장애예술인이 갖는 특성이자 수월성이라고 말하는 데서 우리는 ‘정상’과 ‘장애’라는 범주를 돌아보게 됩니다. 장애여성공감의 진성선 활동가는 배우이자 활동 지원 현장의 코디네이터로서 다양한 주체와 협력하는 몸을 돌아봅니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몸들의 경험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에 몸에 대한 인식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서로 맞대어 서는 몸들에 아낌없는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보냅니다. 몸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이라는 렌즈 속에서는 어떻게 변주될까요? 이러한 궁금증과 기대 속에서 몸에 대한 창작 시 두 편 또한 의뢰하여 함께 실었습니다. 몸을 이야기하는 언어는 다시 그렇게 우리의 몸을 환기합니다.
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꾸려진 글뭉치들 외에도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웹진 ‘놀’ 편집부는 이렇게 문화예술 담론 속의 몸 이야기에 하나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실타래들이 여러분의 사유 속에서 이어져 또 다른 이야기들로 곳곳에 펼쳐나가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2024년 여름, 전에 없는 습도 속에서 ‘놀’ 두 번째 호를 마무리하며
문화살롱 5120 디렉터 배혜정
고요한 밤에는 바깥의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리곤 합니다. 이웃집 전화벨 소리, 한낮에 미처 떠오르지 않았던 말들, 운이 좋다면 풀벌레 소리도 들을 수 있지요. 지하철역과 멀지 않은 집에서는 이따금 방바닥에 귀를 대면 열차가 역을 통과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저는 그것이 도시의 맥박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만약 도시 전체가 거대한 몸이라면, 거기에 호흡을 부여하는 것은 도시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존재일 것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식물까지도 모두 말이죠.
그러나 도시의 구획과 벽들은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 가로놓여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여전히 타자의 영역에 갇힌 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강요받으며, ‘다름’은 이 완벽해 보이는 도시에 균열을 초래하는 불온한 것으로 규정되곤 합니다.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은 언제나 균열로부터 비롯되는데도 말이죠. 어쩌면 우리의 도시 또한 균열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몸에 관한 여덟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성스레 원고를 준비해 주신 필진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부디 한밤의 적막 속에서 나누는 말들처럼 조곤조곤 전해지기를, 그리하여 벽 너머의 서로를 궁금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 매니저 박신욱
이번 ‘vol.2 #몸‘은 여러 필진의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몸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담았습니다. 이번 호를 준비하면서, 각기 다른 몸을 지닌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 아래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곧 기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서로 다른 얇고 투명한 글들은 한데 모여 하나의 말뭉치가 되었고, 그 자체로 충분했습니다.
여러분께선 이 말뭉치 속에서 눈여겨보지 않던 누군가의 동선을 따라가고, 피부 아래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며 건강을 되새기고, 내려다보던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규정된 몸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여정으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작게나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몸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프로그램 매니저 홍해준
세상에 좋은 글들이 너무 많은데,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더 골똘히 찾고 집요히 뒤지지 않으면 우리가 만날 확률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실은 제가 찾거나 뒤졌던 게 아닐 것입니다. 작가님들이 작가님들의 자리에서 언제나 해야 할 말을 해왔기 때문에 마침내 만나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웹진에 기꺼이 참여해 주시고 마음을 모아주신 모든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웹진을 기획하면서 많은 원고와, 원고 속 문장과, 문장을 쓴 사람과, 사람이 속한 단체와, 단체가 하는 활동과, 활동이 가진 의미와, 의미가 파생하는 물결을 보았습니다. 그 물결이 제 안으로 어떻게 스며들고 흡수되는지도 지켜보았습니다. 그건 하나의 큰 몸처럼 느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번 기획 호를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꼭 그 과정을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문화살롱 5120과 웹진 <놀>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꾸준히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코디네이터 김지현
지망생의 노래
기획 칼럼
지망생의 노래
윤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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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중반, 더는 지망생이 되는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십 대의 나는 가수 지망생이었고, 이십 대에는 소설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는 그랬을 것이다. 야간자율학습을 면제받은 채 노래를 부르러 다녔고,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한 뒤로 계속 소설을 쓰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스스로를 지망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지망생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어떤 전문적인 분야의 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 또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들고자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시절마다 사로잡힌 예술에 대한 탐구력이 강하지도, 앨범을 내거나 등단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알량한 재주를 부리고 이따금 누군가 감탄하는 걸 즐기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꿈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이 꿈을 꾸는 게 맞나? 자주 멈칫하게 되는. 그러니까, 지망생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 ‘넌 ~가 될 거잖아’라고 확인하듯 응원이라도 건넬라치면 그저 아리송하게 웃곤 했다. 그건 내 애매한 재능과 진심을 들키지 않기 위한, 남들이 기대하는 내 미래에 미치지 못했을 때를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였지만, 한편으론 진심으로 궁금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면 꼭 가수가 되어야 하나? 소설 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소설가가 되어야 하나? 뭔가를 하고 있다고 선언하면 그걸로 무엇이든 되어야 하는, 이뤄야 하는 루트를 결국 이탈해버리고 말거란 상상으로 괴로웠다. 실제로도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할 줄 몰라 아예 그 마음을 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말았으니, 일찍이 나를 잘 알아봤다고 해야 할까. 외부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도 아무런 다짐이나 각오를 요구받지 않아도 되는 성실한 감상자로서의 자신이 더 잘 어울린다고 서둘러 타협하면서 나는 기나긴 지망생 흉내의 시간을 끝냈다.
이렇게 보니 오랫동안 재능을 ‘어떤 지점에 신속히 도달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단단히 오해했던 것 같다. 재능은 레이스를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데. 나도 좋아하는 마음의 부침을 견디면서 그럼에도 이 짓(!)을 계속 하고 싶은 상태, 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느껴볼 수 있었더라면. 짧지 않은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그러니까 어린 날 내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또래와 구분되는 선명한 재능이 아니라 헤맬 수밖에 없는 삶의 속성을 받아들이는 지구력이었음을, 이제는 안다는 뜻이다. 안다고 위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지망생’을 관둔 서른에게 필요한 건 때늦은 위로가 아니라 회복이었다. 다행히 삶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수정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며 삼십 대를 보내고 있다. 운이 좋게도 매주 꼬박 한 시간씩 내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팟캐스트를 진행 중이고, 소설보다 늦게 쓰기 시작한 산문으로 묶인 책이 하나둘씩 쌓이고 있다. 노래와 소설을 통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전하는 요즘이 문득문득 신기하다. 상상한 적 없는 삶을 노력하며 이어가고 있다는 게 꼭 내게도 잠재력이랄까 가능성이 있었다는 증거 같아서 몰래 벅차오르기도 한다. 타인의 번뜩이는 재능 앞에선 여전히 초라함을 느끼지만 내가 지닌 장점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덕분에 까닭 모를 불안에 휩싸여도 섣불리 끝을 점치려 하는 충동이 줄었다. (물론 지금은 또 다른 서투름으로 뚝딱거린다….) 좋아하는 일을 어려워하며 해내는 괴로움으로 뿌듯할 때마다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는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에 감히 공감하는 날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시 ‘지망생’이 될 수 있었다. 1년 전 덜컥 작사 클래스를 등록한 뒤 첫 수업을 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곁에 두지 않겠다고 입을 다문 시절이 떠올랐다. 맞아 그랬지. 그런데 걸어 잠근 마음에 금이 가는 것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언젠가의 나처럼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대신 이 마음에 정확히 대답하고 싶어서 10개월의 커리큘럼을 포기 않고 따라가 봤다.
노래를 잘 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는 계속 불러보며 쓰는 것이다. 이때의 가창이란 내 가사가 데모곡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지, 멜로디와 가수의 입에 잘 맞을지 점검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만, 쓰고자 하는 가사를 다름 아닌 내가 가장 먼저 불러본다는 점이 나로서는 어떤 위로가 되었다. 알고 보니 노래를 쓰는 일과 노래를 부르는 일이 가깝다는 사실이, 그걸 직접 알아채 버린 오늘이 놀랍고 반가웠다. 완전히 종결되어 상실로 남은 시절도 새롭게 이어질 수 있음을, 작사를 배우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마침내 나에게 돌려줄 말 한 마디도 얻었다.
‘이제는 뭔가를 원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있어서도, 너무 간절히 원해서도 아니고 한번 되어보고 싶은 그 마음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라고.
혼자 되뇌었을 뿐인데 속이 다 시원하다. 기대하는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지켜볼 수 있는 거였구나. 어처구니없는 홀가분함이 밀려온다. 그러므로 가요대회에 나갔던 10대처럼, 문학상에 응모했던 20대처럼, 30대의 나도 여전히 지망생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애쓰는 나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 깨끗한 기대에 따라오는 응원을 느낀다. 내가 줄곧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클래스의 정규 수강은 끝났어도 학원에서 제공하는 데모곡을 받으며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유독 내 취향의 노래를 받는 날이면 언어의 진짜 자리는 멜로디 위가 아닐까? 하고 호들갑을 떨지만, 새벽 내내 빈 문서를 마주한 채 한 곡을 반복재생하고 있다 보면 슬쩍 겁이 난다. 작사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져서 언젠가 지금의 즐거움을 잃어버릴까 봐.
어쩌면 이런 게 진정한 지망생의 마음이겠지. 지금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뒷걸음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살면서 한 번은 더 지망생이 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써의 지망생이라면 거의 처음 겪는 거나 다름없겠지. ‘어떤 전문적인 분야의 일을 배우는’ 사람이자 이왕이면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들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되고 싶어!’라는 말을 질러 놓고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윤혜은
책방지기, 작가, 그리고 작사가 지망생. 오래하는 일을 결국 가장 좋아하게 된다.
에세이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 『아무튼, 아이돌』, 팟캐스트 ‘일기떨기’에서 출발한 대화집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는 그렇게 탄생했다.
동료 작가와 함께 망원동에서 ‘작업책방 씀’을 운영하고 있다. 이다음에는 어떤 작업의 결과가 먼저 올지 즐겁게 기다리는 중이다.
비평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나는 왜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가?
기획 칼럼
비평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나는 왜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가?
이연숙(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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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놀>의 청탁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런 주제라면 재미있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소 네가 뭔데? 싶은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은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제에 대해 생각할수록, 스스로도 내가 도대체 왜 비평을 통해서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그러게…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적당한 구실을 찾을 수 없지만, 내가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 싶어한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 단순히 말해 그들이 생산해내는 특수한 종류의 (주로 시각적인) 미적 대상과 감각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좋고, 또한 그런 대상과 감각이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내 나름의 관점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이를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일시적이나마 모종의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좋다. ‘좋다’ 말고 좀 더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그런 단어를 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것이 스스로에게 최대한 정직할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비평 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특정한 계기도 시점도 기억나지 않고,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결국 우연히 그렇게 됐다는 말만 변명처럼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와 미술 대학을 거치면서 형성된 특수한(그러나 다분히 제도적으로 중층결정된) 주관이 나를 비평가라는 이름에 이끌리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 이름에 딸려 오는 상징 자본을 아마도 나는 갖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지금도 시원하게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항상 누군가에게 내세울 수 있는 그럴싸한 이름을 원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내가 이론이 되기에는 너무 ‘문학’적인 종류의 글쓰기들에 내내 매혹당해 왔다는 점 역시 비평 쓰기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요컨대 발터 벤야민의 글이 그렇다. ‘문필가’ 벤야민의 널리 알려진 에세이들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문자 역사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상투적인 대상들을 지극히 비밀스러운 암호라도 되는 양 재독해한다. 그의 <일방통행로> 속 “아크등”이라는 표제에 딸린 단 하나의 문장,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를 보라. 이것은 철학적 난제인가? 그보다는 오랜 짝사랑 중이던 그의 일기장 속 한 문장에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벤야민은 자신의 기억을 일상적인 장소들, 사물들, 단어들의 이미지와 결합하며 그것들이 우리의 세계 가운데서 평범한 배경이 아니라 독특한 전경으로 다시금 솟아 오르도록 만든다.
이런 그의 일견 사색적인 태도는 시원스럽게 칼로 세상의 분할선을 뚝뚝 재단하고 어떤 건 ‘옳고’ 어떤 건 ‘안 된다’고 말하는 비평적 글쓰기의 논객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나는 그런 촌철살인의 글쓰기도 좋아한다. 요컨대 <예술의 비인간화>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새로운 예술의 출현에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날리는 냉소적인 ‘일침’을 보라. “이러한 [새로운 예술을 하는] 젊은이들과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그들을 사살해 버리든지 아니면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아니면, <장식과 범죄>에서 아돌프 로스의 장식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의 표현은 어떤가? “현대의 인간이 자기 몸에 문신을 한다면 그는 범죄자이거나 인격파탄자다. (…) 문신한 자가 자유로이 죽었다면, 그것은 그가 살인을 저지르기 바로 몇 년 전에 죽은 것이다.”(문신이 많은 사람으로서 나는 이 대목을 기껍게 웃으면서 읽었다.) <시각과 언어2>에서 최민이 인용하는 M. 포레브스키의 비평가에 대한 정의도 재밌다. “[비평가는]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고 미술가가 되지 못했고 차선책으로 비평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비평가란 다른 무엇보다도 게임을 하는 선수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는 유일한 목표는 그 게임이 연장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내기를 거는 사람이다.” 그의 정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이런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당연히 나 역시 그가 하는 게임에 참여하고 싶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까지 쓰고 깨달은 점이 있는데 지금까지 인용한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낄 수 없는 게임에 참여하려는 ‘발칙한’ 욕망을 품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비평을 쓰고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된(아니, 연결된 것 같다고 혼자 믿고 있는) 까닭은 이런 우연한 계기들의 누적을 통해서다. 비평 또는 에세이라 분류되곤 하는 ‘애매모호한’ 종류의 글쓰기와 그런 글쓰기를 하는 이들에게 매혹되고,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다 보니 비슷한 유형의 글쓰기를 하게 되고, 그렇게 계속 쓰다보니 점점 더 쓰기를 통해서만 (세상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쓰는 사람들이라면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부디 그래주기를 바라지만) 내 경우에는 원래도 좀 둥글지 못하고 모나고 예민하던 성격이 쓰기를 지속하면서 더더욱 비사회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 이제 쓴다는 것은 선택의 차원에 귀속된 문제도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글의 제목에서 제기되는 질문을 바꿔보면 어떨까? “나는 왜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왜 비평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될 수가 없는가?”로. 이제 대답은 한결 명쾌해진다.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가 아니면 동료 예술가들은 물론이고 세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비평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사회적 능력의 결여를 뜻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물론 나는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좋다’에 앞서, 그것 외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불능의 감각이 내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 어떻게 비평 쓰기를 통해 이 같은 불능의 감각을 공동의 것으로 작동시킬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이것은 내가 책임감을 느끼는 몇 안 되는 ‘문제’들 중 하나다).
갑작스럽지만 여기서 떠오른 타가메 겐고로의 만화 중 한 장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게이, 강간, 폭력적인 성교, 성적 비행, 강압, 마약, BDSM, 에로틱 만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일본의 만화가”인 타가메 겐고로의 작품 중에서 『PRIDE』라는 장편 만화가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불법 야망가 사이트에서 처음 접했는데, 사디스트이자 돔 성향의 교수에게 반한 마조히스트이자 섭 성향의 대학생이 극한까지 그에게 조교당한 끝에 (실존적/육체적/사회적으로) ‘해방’되는 과정이 스토리의 주된 골자를 이루고 있다. 스토리가 고조되는 어느 한 시점에서, 대학생은 고문에 가까운 플레이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저는… 미칠 것 같아요!” 격려와 저항이 오가는 실랑이 끝에, 교수는 그런 대학생을 향해 (이제는 트위터 등에서 밈화됨으로써 작은 명성을 얻기도 한 대사인) 사자후를 토해낸다. “뇌에서 육체를 해방시켜!!”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대학생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 몸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생의 몸은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으로서는 절대 도달해서는 안되는 어떤 ‘선’을 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고통을 위험이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지가 작동하기도 전에 그것을 쾌락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고통이 한편 (역설적으로 인간 종의 생존에 필수적이기까지 한) 쾌락일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 지면에서 더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어쨌든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생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학교에 다니고, 시험을 치고, 친구를 사귀는 등의 사회적인 삶에 수반되는 ‘평범한’ 일상적 행위와 관습과는 아무 상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뇌에서 육체를 해방”시킴으로써 비인격적이고 비개성적인 육노예 중 하나로 전락 또는 ‘돈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생명력을 소진할 때까지) 쾌락을 생산하는 기계일 뿐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기로 동의한 그런 형태로서 생활을 꾸릴 수는 없는 존재다. 이처럼 때때로 하드코어 야망가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어떠한 계기로 ‘선’을 넘어 비가역적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다리는 불태워졌고, 되돌아 갈 수는 없다…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쓰는 일 외에는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불능감에는 의외의 해방감이 뒤따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이연숙(리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2015 크리틱엠 만화평론 우수상,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규칙의 인식과 변형 – 한국 동시대 미술 의 ‘규칙’에 대한 문제제기 허경
기획 칼럼
규칙의 인식과 변형 – 한국 동시대 미술의 ‘규칙’에 대한 문제제기
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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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프랑스철학과 미술
불문과를 나오고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미셸 푸코와 현대성>이라는 주제로 학위를 받은 나는 2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른바 현대프랑스철학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수업을 해오면서 이러한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 중 상당수가 미술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물론 이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로부터, 고야와 고흐에 대한 언급, 마그리트를 다룬 책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단행본으로 출간된 강연 『마네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 관련 책들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조만간 이런 저술을 함께 해설하는 『푸코와 미술』이라는 책을 출간하려 한다). 이들은 회화와 조소로부터 설치와 영상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시각 예술가, 작가로부터 학부생, 대학원생, 강사, 교수, 그리고 비평가 등이다.
더욱이 나는 최근 4~5년 전부터는 우연한 기회로 인연이 닿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아트플러그 연수, 인천아트플랫폼, 팔복예술공장 등의 여러 레지던시에서 <작가노트,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주제로 작가를 위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원래 나의 직업은 이른바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불문과를 나온 것처럼 시와 소설 등 ‘문학’을 좋아했고, 더구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여 팝ㆍ록부터 클래식, 현대음악, 국악과 월드뮤직에 이르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섭렵하며, 한때 후배 음악비평가들과 함께 음악 잡지를 창간하(여 망해보)기도 한 ‘덕후’인데, 이제는 미술에까지 나의 관심 영역이 확대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개인적으로도 줌 온라인 수업을 통해 같은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나로서는 정말 훌륭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 것이라, 여러모로 과분한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있다.
규칙의 인식과 그 변형
이렇게 몇 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작가들의 글을 읽고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도록에 실릴 작가론 또는 전시 서문을 작성하다 보니, 나는 이 동시대 작가들이 보여주는 고유한 특징 몇몇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내 생각에, 그 공통점은 이들 작가 중 상당수가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규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나의 직업이 철학자이고, 특히 ‘사물의 질서’를 다루는 푸코의 『말과 사물』에 크게 영향받은 사람이라 이런 점에 나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규칙의 문제를 작업 노트에서 특별히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 중 나의 수업을 들었거나 내가 직접 작가론을 써준 작가들은 문채원, 박경종, 박지혜, 정기훈 등이다(사실 모든 ‘참다운’ 예술가들이란 지난 시대의 규칙을 변경시킨 이들이므로 모든 예술가는 크든 작든 규칙의 존재를 의식하며 이에 대해 작업하고 있을 것이고, 사실 짧지만은 않은 기간 동안 작가들의 작업을 보고 글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규칙의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관심이 없는 작가는 한 명도 보지 못했지만). 이 작가들은 ‘규칙의 존재와 그의 변형’을 작업에서 의식적 형태로 추구하며, 이를 작업의 중심적 주제 또는 그러한 주제 중 하나로 설정하는 작가들이다. 아래에서는 이들 중 자신의 ‘작업 노트’ 혹은 (작가의 의견이 강력히 반영된) ‘소개의 글’에서 ‘규칙’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몇몇 사례만을 들어보려 한다.
문채원 – 각자의 매뉴얼
‘매뉴얼 등의 규칙을 재해석하는 데 집중해온’ 문채원은 2020년의 리:플랫 전시 <너무나 선량한 말들>에서 ‘사용자를 정해진 방향으로 이끄는 신호에 주목하며 비상 탈출을 위한 안내서부터 공익을 위해 만들어진 규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칙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 작가로서 소개된다. 문채원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많은 규칙을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끔 유도하여 우리의 기존 사고방식에 균열을 야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문채원은 ‘지침이 그 기능을 잃고 적극적으로 오역되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따라가기만 하면 목표를 성취할 것이라 여겨지는 매뉴얼의 작동 방식에는 보이지 않는 허점과 오류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사용 지침에 의문을 제기하고’ 또 ‘규제가 지닌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일은 ‘삶의 방식을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기에, 완전한 형태의 매뉴얼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는 인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결국, 이는 각자가 ‘변화하는 삶에 대응하는 자신만의 유연한 지침을 세우는 데에 이번 전시가 ‘선량한’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박경종 – 엄격한 경직성에 반하는, 즐거운 삐딱함
박경종처럼 진지함과 심각함이 서로 분리 가능한 별개의 가치들임을 잘 보여주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박경종은 진지하나 결코 심각하지 않다. 박경종 작업의 특징이자 장점은 바로 이렇게 – 상당히 무겁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경우에도 – 결코 유머를 잃지 않고 가벼움과 경쾌함을 유지함으로써, 관객이 큰 거부감 없이 주제를 놀이처럼 다룰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박경종은 2023년의 전시 <그럴 수도 있지>를 위한 ‘작가의 글’에서 이렇게 적는다. 이는 “입장과 어투에 따라서 너그러운 배려, 또는 불평, 불만도 되는데,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지’에 다다르면 판단의 기준이 유연해진 대인배가 되기도 한다. 당연하지는 않았지만 노력해서 납득하거나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해진 규율과 법칙에 반해서 생각하고 기존 인식에서 벗어난 초연한 상태, 중립성을 유지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시점이다. 이번 전시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자 관람 포인트이다.” 박경종에게 ‘규칙과 법칙’은 과거, 기존의 것, 닫힌 경직됨을 상징하며, 그 ‘바깥’은 현재, 지금의 것, 열린 유연함을 상징한다. 이는 세계의 확정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 성질에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따라 나와야 하는, 태도이다. 박경종에게 이런 경직성과 유연함의 대비는 2021년의 ‘이발소’ 영상 프로젝트 <모발라이즈>에서 보여준 밥 로스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가 보여주듯 – 개념과 텍스트가 이미지를 지배하는, 그리하여, 주객이 전도된(?) – 현대미술의 엘리트주의적 위계질서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이런 태도는 모든 것을 그 나름의 관점에서 긍정하는 민주주의적 태도와도 관련된다).
박지혜 – 세계의 불확정성 앞에서 망설이는,
박지혜는 2017년의 첫 개인전 에 붙인 <작업 노트>에서 “규격-한계-단위-양식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시스템 내 책임의 프레임을 읽어내고 그 과정에서 익숙하기 때문에 옳은 것, 명분으로서만 잔재하는 것 등 시대의 요구와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영역에 주목하고” 있다고 적는다. 어떤 사태에 대한 인식은 이미 사태에 대한 특정 방식의 선이해를 전제하므로, 인식은 이미 사태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칸트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우리는 프레임 없이는 아무것도 보거나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기존 시스템, 규칙에 대한 인식은 이미 기존의 시스템, 규칙으로부터 이탈하는 하나의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계를 작동시킨다. 따라서 박지혜의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기존 시스템에 대한 ‘스마트하고도, 쿨한’ 반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대항-시스템은 다시 정통-시스템이 되기 마련이다(순진한 믿음과는 달리, 모든 것은 옳음과 합리성을 전투의 장(場)으로 삼는 권력투쟁이다). “제가 작업 노트나 압박 면접 상황에서 반복 사용하는 어휘들이 있습니다. 기준, 조건, 한계, 양식, 규격, 합의, 기타 등등… 이들은 겉보기에 매우 견고하지만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의외로 쉽게 휘어지기도 합니다. 다만 이 단어들이 자주 나타나는 장소, 위치 때문에 왠지 극복해야 할 것 같은-반발심을 불러일으키죠. 하지만 글쎄요. 우리는 투덜투덜하다가도 시스템에 은근슬쩍 기대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거창한 제목인 『표준의 탄생』이 그냥 그런 어느 집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작가는 너무 투명한 말들과 너무 어두운 말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기울지 못하며 흔들리는 태도, 곧 망설임을 선택한다. 아마도 기존 규칙은 사라지고 새로운 규칙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기에 누군가가 취해야 할 윤리적으로 올바른 유일한 태도는 판단중지와 망설임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살고 예술을 행해야 하므로, 결국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말해야 한다, 너무 명확하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 늘 망설이면서.
정기훈 – 사회적 규칙의 개인화
정기훈은 2022년의 전시 <연마술>의 <작업 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적 규칙들을 발견하고 재해석하여 개인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두고 설치와 영상으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전 2018년의 전시 <연중무휴>에서 정기훈은 이렇게 말한다. “작업에 규칙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규범과 규칙들이 개인의 삶을 보호해주고 있는지 아니면 규칙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지 나는 이러한 질문에 아주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많은 비평가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정기훈의 작업을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경제 시스템, 곧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반하는 예술적 작업’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근거이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나는 정기훈의 작업을, 보다 넓게 해석하여, 현재의 지배 시스템의 바깥을 상상하는 작업, 나아가 서양-현대-미술이라는 삼위일체의 바깥을 상상하는 작업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위한 일반적 논의는 보편성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오늘날 ‘보편성’과 ‘서양적 보편성’은 거의 등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이를 서양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고 명명했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보편성은 ‘개별자들을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그 개별자들로 만들어주는 메타적인 무엇’이다. 이처럼 보편성은 제국의 논리이다. 제국이란 ‘기준, 규칙을 제시하고, 이를 구성원들에게 현실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한 강제의 시스템’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작가들에게 20세기 유럽에서 설정된 서양 현대미술의 규칙들이 의식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이제까지 불편 없이 제국의 논리, ‘그들’의 규칙을 따라왔던 ‘우리’가 이제는 불편함을 느낀다는 말 이외의 어떤 의미도 아니다. 헤겔의 말대로, 인간은 오직 ‘불편한 것’에 대해서만 의식을 갖는다. 이는 현실과 의식 사이의 괴리, 곧 자기 소외이다. 한편 소외는 자신의 현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동을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오늘 우리 작가들이 규칙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적으로 ‘더 이상 서양의 규칙에 불편함 없이 적응할 수 없는’ 우리 작가와 사회의 성숙, 그리고 ‘오늘-여기-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규칙과 기준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표준의 탄생
규칙의 인식 자체가 이미 규칙의 변형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미술계ㆍ예술계는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에 의해 해석된 유럽과 서양의 시스템, 규칙을 무비판적으로 내재화했다. 식민이란 이식(移植, 옮겨 심음)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까지 남의 눈으로 세계를 보아왔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과거 남의 눈으로 우리와 세계를 보던 우리의 작가들은 이제 오늘 나의 눈으로 우리와 세계를 본다. 대학 제도로부터, 갤러리, 옥션, 현대미술의 코드,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는 이 모든 시스템과 규칙에 대해, 우리는 오늘 묻는다. “이건 모든 규칙들은 누가 정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이미 그 자체로 내가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이끈다. 이는 이미 새로운 인식과 표준의 탄생에 대한 요청이다. 규칙(rule)을 만들고 해석하는 이가 지배자(ruler)이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겠다는 마음은 더 이상은 이렇게 내게 맞지 않는 남의 불편한 옷을 입고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이자, 내 생각의 옷은 이제 내가 해 입겠다는 의지이다(이는 그러한 능력을 전제로 하고, 이어 불가피하게 나의 옷이 우리의 옷이 되어야 한다는 지배의 의지, 제국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한 가장 좋은 요약은 박지혜가 2018년의 <표준의 탄생 – 에필로그>에 적은 다음의 말일 것이다.
“당신의 기준대로 읽으시오.”
허경
철학자. 대안연구공동체, 철학학교 혜윰.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철학박사.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인천아트플랫폼, 전주팔복미술공장 등의 레지던시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작가들을 대상으로 ‘철학과 작가노트’ 개념의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살롱 5120 제1회 웹진 ‘놀’ 문학공모 심사평
문학 공모
심사평
문화살롱 5120 제1회 웹진 ‘놀’ 문학공모 심사평
심사위원 일동
[본문 크기 조정]
문화살롱 5120이 펴내는 웹진 ‘놀’은 청년 예술인에게 창작의 기회를 펼칠 수 있는 지면을 제공하고자 지난 9월 13일부터 10월 22일까지 창간호를 위한 문학 작품을 공모하였습니다. 총 41명이 응모했으며, 108편(시 64편, 단편 소설 13편, 에세이 14편, 시나리오 6편, 미술비평 2편, 기타 8편)의 원고가 접수되었고, 이 중 문화살롱 5120을 위탁 운영하고 있는 단국대학교 부설 한국문화기술연구소 내부의 예비 심사를 거쳐 본선에 진출한 작품들(시 24편, 단편 소설 2편, 에세이 4편, 문학비평 1편)을 신중히 검토하였습니다. 본선 심사에는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소장 박덕규(소설가, 시인), 노원구 시인 조항록,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 교수 이은주(문학평론가)와 배혜정(미술평론가, 문화살롱 5120 디렉터)가 참여하였습니다. 문학성과 완성도 그리고 문장력을 고려한 심사를 거쳐 단편 소설 1편과 시 2편을 선정했습니다. 심사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설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다는 장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스토리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소설은 문제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소설이 스토리를 들려주는 데 급급해서는 곤란하다. 스토리를 품고 하나의 담론적 상황을 만드는 것! 이 점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란다. 이번 응모작 중에서는 「너는 겨울잠을 잔다」가 그나마 이런 고민을 거친 결과로 보인다.
신인의 시에서 흠결을 들추기보다는 미덕에 주목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시를 쓸 테니까. 최종심에 올라온 8명의 24편 가운데 임혜리의 시 「표류」, 「다중우주의 당신」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임혜리의 작품들에는 삶의 비애가 깃들어 있다. 누구나 단독자로 살아낼 수밖에 없는 인생이 처연히 나뒹군다. 그래서 그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일이 아프지만 그것이 시인에게는 어쩌지 못하는 숙명이겠지. 그저 “경유가 목적인 삶”이라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당선자가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작은 위로를 건네면 좋겠다.
웹진 ‘놀’의 다음 호에 더 많은 작품들이 응모되길 바라며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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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모
시 당선작
다중우주의 당신
임혜리
[본문 크기 조정]
그 사람과 인사하지 못했다
비가 떠난 자리에 꺼끌꺼끌한 홈이 파였다
떨어진 새잎의 얼굴이 결코 닿을 수 없는 바닥
계절이 이별의 목선을 훑는 동안
당신은 어디로 갔는가
억겁의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애벌레의 오줌 같은 이슬이 손톱을 통과했다
물방울 속에 하나의 지구가 담겨있고
또 다른 당신이 있다
비로 환생하고 싶다던 당신
이제는 웃고 있을까
당신을 맞이하려고 우주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웅크렸다
안녕 인사하면
끝나지 않는 장마가 밤을 차갑게 도려낸다
webzine-vol1-2
문학 공모
시 당선작
표류
임혜리
[본문 크기 조정]
누군가 지나는 길목에
청설모가 둥지를 틀었다
경적을 먹고 자라는 새끼들
경유가 목적인 삶도 있다
보청기를 두고 간 할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은 정류장이었다
마음을 내보이지 못했더니
모든 세계가 나를 지나쳤다
상하이는 적막했다
빈 의자가 있어도
아무도 내게 앉으라 하지 않았다
상처를 놓아두는 비행을 연습해도
마음은 자라지 않았다
둥지를 떠난 청설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webzine-vol1-1
발간의 글
발간의 글
웹진 놀 편집부
[본문 크기 조정]
웹진 ‘놀’ 발간에 부쳐
웹진 ‘놀’은 지난 2023년 6월 5일 개관한 문화살롱 5120이 펴내는 예술종합잡지로 반년간 발행됩니다. 이번 창간호에는 원고 공모를 함께 진행하였는데요. 이처럼 매년 상반기에는 기획 원고 중심의 문화예술종합지로, 하반기에는 원고 공모가 이뤄질 예정입니다.
문화살롱 5120은 노원구가 청년 예술인을 발굴, 지원, 육성하며 지역 예술인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 아래 개관하였습니다. 그러한 만큼 ‘놀’은 시작하는 청년 예술가와 함께하고자 합니다.
시작하는 예술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창작 환경 조성, 창작 예술품 공표 기회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놀’이 목표로 하는 것은 신진 작가에게 지면을 제공하는 것과 문화계의 담론 생성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놀’ 창간호는 공모 세션과 기획 세션으로 나누어 준비했습니다. 공모는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지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기존의 공모에는 소설, 시와 같은 문학 장르별 구분이라던가 픽션, 논픽션과 같은 보다 상위의 구분 등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놀’은 장르 구분에 연연하지 않고, 글쓰기에서의 잠재 영역을 위해 여지를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투고해 주신 시, 소설, 예술 비평,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원고는 저희 ‘놀’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쉽게 공모에 당선되지 않은 투고자분들에게도 아낌없는 응원을 전합니다.
기획 세션의 필진으로는 철학자 허경, 미술평론가 이연숙(리타), 작가 윤혜은이 참여했습니다. 디렉터와 두 프로그램 매니저, 코디네이터로 구성된 웹진 기획팀은 담론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구성했습니다. 이러한 필진 구성은 문화예술 현장을 또 다른 관점과 사유 속에서 다채로운 논의를 담아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는데요. 그에 따라 글의 주제에 있어서도 특별한 제한 또는 제안 없이 열린 주제로 써 주시기를 부탁드렸고, 글의 내용에 있어서도 필자의 글에 대한 최소한의 교정, 교열만을 거쳐 실었습니다. 따라서 ‘놀’의 창간호에 실린 원고는 각 필자의 주제와 논조를 편집진의 개입 없이 그대로 실은 것임을 밝힙니다.
예술은 언제나 인류와 함께였습니다. 힘든 시기에도 예술가들은 다채로운 형상과 내용으로 시대를 노래하고 그려냈지요. ‘놀’은, 그리고 문화살롱 5120은 이러한 예술의 힘을 믿습니다. 저희의 행보를 편견 없이 그러나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아 주시고 참견해주시고 그럼에도 애정을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23년 다시 추워지는 겨울에
문화살롱 5120 디렉터 배혜정
따스한 여정
문화살롱 5120에서 웹진 <놀>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어 기쁩니다. 글을 기고하신 분들과 함께하는 이 첫걸음, 마치 말과 생각이 서로의 손을 잡고 춤추는 듯합니다. 웹진 <놀>은 예술, 문학 그리고 일상의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입니다.
웹진을 기획하며 저에게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고민이나 생각이 비대해질 때 글을 씁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림자를 밝혀내듯 손끝에서 타닥타닥 튀는 불씨처럼 글을 토해냅니다. 퇴고를 거쳐 그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가라앉고 온기가 저를 감싸 안을 때, 글쓰기의 마법이 진정한 따스함을 안겨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글은 저마다의 따스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추운 겨울이지만 웹진 <놀>은 필진 분들의 고민과 생각이 담긴 글을 토렴하듯, 온기를 담아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 특별한 여정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웹진을 통해 찾아올 따뜻한 감성과 소소한 위로가 여러분의 일상에 조금이나마 따스함을 전해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프로그램 매니저 홍해준
새로운 마음으로 ‘놀’ 준비
문화살롱 5120이라는 공간이 열리고 사람들을 맞이하기 시작한 지 어언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공트럴파크’ 산책로 중간 어딘가쯤에 있는 이곳에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의 첫 마디는 항상 같습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공간을 둘러보고 난 후의 표정들 속에는 익숙한 길에서 새로운 장소를 발견했다는 신기함과 일상생활 중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술을 경험한 데에서 오는 기쁨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공간에서 보여주는 시각적 새로움뿐 아니라, 물리적 한계를 넘어 웹상에서도 새로운 만남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웹진을 기획하였습니다. ‘새로움’의 사전적 정의인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는’, ‘전과 달리 생생하고 산뜻한’ 마음이 여실히 담긴 두 청년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며 웹진 <놀>을 시작합니다. 말이 생각을 지나 정제된 단어와 문장으로 정돈되어 유려한 글이 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들은 늘 짜릿함을 안겨줍니다. 임혜리, 장아연 두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과 개성 있는 문체로 읽는 내내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언어의 마법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필진 세 분의 기획원고를 통해 청년 예술인으로서의 고민과 그들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을 동시에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매일의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경춘선숲길만큼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나갈 웹진 <놀>을 기대해주세요.
프로그램 매니저 송수빈
시작하는 이야기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웹진을 준비하면서 리베카 솔닛의 문장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원고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우리가 각자 고독했지만 줄곧 연결되어 있었음을 느꼈습니다.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맥도날드에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가뿐하게 노트북을 열어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것이 과제거나 결재서류거나 메일이거나, 전혀 다른 무엇이어도 우리는 참 많은 걸 쓰면서 사는구나를 깨닫기도 했습니다. 쓰는 만큼 읽는 사람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타인의 문장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려 애쓰는 그 수고로운 행위를 모두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각기 다른 색깔의 원고를 읽으면서 문장 너머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코디네이터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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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모
소설 당선작
너는 겨울잠을 잔다
장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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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연입니다. 펭귄님이 보내셨네요. 하하, 이것 참. 아무리 제 팬이셔도 그렇지, 이름까지 따라 하시면 됩니까?
펭돌의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렸다. 이제 욕조 안엔 온통 솜뿐이었다. 려아는 없었다. 그 애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짐을 챙겨 떠났으니까. 머릿속엔 온통 활짝 웃으며 머리카락을 살랑이던 려아의 모습뿐이었다. 그날도 려아는 발목을 덮는 검정 원피스를 입었고, 단화를 신었다. 려아에게서 시원한 민트 향이 풍겼다. 나를 설레게 했던 모습 그대로 찾아와 려아는 작별을 고했다. 우린 이별하는 게 아니야, 잠시만. 잠시만 떨어지는 거야. 난 돌아올 거니까. 정말 언젠가는.
안녕하세요, 저는 3년째 애인과 동거하던 사람입니다.
나는 가만히 욕조를 바라보다 움찔했다. 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펭돌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잠을 자고 싶었어요. 겨울잠을요.
겨울잠, 그 단어를 듣자마자 심장이 요동쳤다. 나도 모르게 방송을 꺼버렸다. 려아였다. 그건 려아가 분명했다.
려아는 취직하고 난 뒤 매일 같이 야근을 일삼았다. 나는 려아가 땀에 푹 젖은 블라우스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으면 뒤처리를 했다. 려아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고 싶어, 최소한으로 입을 벌려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묻기도 전에 려아는 내 목덜미를 감싸고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고 려아의 혀가 내 어금니를 쓸었다. 려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대방을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키스로 상황을 무마하려 들었다.
왜 인간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 거야? 왜, 대체 왜…….
려아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나는 려아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려아가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기다렸다.
나는 소파를 등받이 삼아 몸을 기댄 후 텔레비전을 켰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많은 프로그램 속 내 눈에 띈 건 내레이션이 차분한 펭퀸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펭귄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화면 속엔 얼음으로 둘러싸인 남극의 풍경과 삼삼오오 모여 사는 펭귄들이 비쳤다. 카메라는 그중 한 펭귄을 잡았다. 태어난 지 40일도 되지 않은 아기 펭귄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기 펭귄은 아직 체온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곧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눈발은 거세지고, 아기 펭귄의 여린 털 위에 눈이 쌓인다. 아기 펭귄은 아무 수컷 품에 파고들어 갔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자기 새끼가 아님을 눈치챈 펭귄은 아기 펭귄을 밀어내고 부리로 쪼아 쫓아냈다.
이제 아기 펭귄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아기 펭귄은 죽고 마는가. 눈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아기 펭귄은 수컷 찾길 포기했다. 아주 자그마한 펭귄이 점점 눈에 파묻혔다. 펭귄의 목 주변까지 눈으로 뒤덮이기 직전, 수컷이 아기 펭귄을 감싸 안았다.
이 경험을 통해 아기 펭귄은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수컷과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말이죠.
뒤이어 내레이션이 들렸다. 나는 안도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손톱 주변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트북을 켰다. 려아가 떠난 걸 떠올리면 내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지만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영화과를 졸업한 내겐 구린 영화를 거르는 법과 빠르게 영상을 처리하는 편집 실력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택한 일은 개인 방송가 펭돌의 밑에서 일하는 거다. 1인 개인 방송 라이브가 끝나면 서너 시간가량 되는 영상을 펭돌이 원하는 만큼 쪼개 재밌게 편집하는 일이었다. 려아는 펭돌을 좋아했다. 속 시원하게 말도 잘하고 재미있다고. 가끔 펭돌의 라이브도 챙겨보았고 대부분 편집된 영상을 계속 다시 보았다. 내가 편집한 영상들은 려아의 눈에 담겼다. 려아는 까르르 웃어대며 내 손으로 재배치한 영상을 좋아했다.
귓가엔 펭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사연을 읽었다. 나는 손을 바삐 움직여 40분이 넘어가는 첫 번째 영상을 6~7분으로 줄이는 작업을 했다.
이제 그 사람은 애인이 아니지만요. 아니, 저는 돌아갈 거지만. 저는 겨울잠이 끝나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거거든요. 제 애인이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난 잠이 필요해, 수면 말이야. 귓가에 려아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속에서 무언가 끓는 듯했다. 볼륨을 올렸다. 사연을 다 읽은 펭돌은 한참을 침묵했다.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뿌예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굳어버렸다.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귀를 열었다.
사연자분. 아니, 펭귄님. 뭐 어쩌자는 겁니까? 자, 다시 읽어봅시다. 겨울잠을 자고 싶어서 애인을 떠났다……. 이게 뭔 개소리입니까?
냉동고에 깊숙이 잠들어있던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잔은 없었다. 뚜껑을 따 음료수처럼 꿀떡꿀떡 마셨다. 천천히 취기가 올라왔다.
펭귄님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애인은 막 기다리고 자시고 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강아지예요? 잘 살겠죠. 님이 떠나갔으니까 더 잘 살아야죠. 그게 펭귄님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펭돌은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려아는 내게 떠나겠다고 언질을 줬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펭돌의 말을 부정해 보았지만 나는 절실히 알았다. 려아 또한 내게 당일이 되어서야 떠난다는 사실을 고백했으며 그전까진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걸. 그러니까 내게 한 말은 일종의 통보였다.
너는 나랑 있는 게 지긋지긋했어?
려아는 눈물이 그렁한 채로 있는 나를 보며 짐짓 당황하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여태껏 회사에 출근하는 내내 썼던 사퇴서가 있다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다. 려아는 가방을 뒤집어 보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건 포효에 가까웠다. 흰 봉투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흰 눈 같았다. 려아에겐 잠이 필요했다. 겨울잠, 하지만 려아. 펭귄은 겨울잠을 자지 않아, 그건 너도 알잖아?
그리고 이 방송 보실지 모르겠지만 펭귄님 애인 분. 이런 사람 사랑해서 뭐합니까? 사랑이 장난이에요? 그냥 다 지우시고 홀로서기 하시죠. 누구보다 잘 사세요. 아셨죠?
소주를 들이켰다. 당신이 뭘 알아, 려아는 돌아올 거야. 나와 약속했는걸. 볼이 붉어지고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었다. 아까 다 못 본 펭귄 다큐를 틀었다.
한 펭귄이 있다. 곧 태어날 펭귄의 알을 발밑에 조심히 쥐고 있는 펭귄. 이 펭귄은 알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꼿꼿이 서서 잠을 자고 부리로 알을 건드려보기도 한다. 내레이션은 말한다.
이 알은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조금만 펭귄의 품에서 벗어나도 얼어버리고 맙니다.
펭귄은 혹여 알을 놓칠세라 소중히 품는다. 소주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 이 하나하나가 시원해졌다. 조심히 알을 다루던 아빠 펭귄이 실수로 알을 놓친다. 급히 다시 알을 주워 품어보지만 이미 알은 제 기능을 잃는다. 안에 잠들어있던 새끼는 죽었고 펭귄은 끝없이 알을 품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펭돌의 전화였다. 나는 다큐를 멈추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아니, 설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합니까? 제가 분명 영상 새벽까지 보내달라고 늘 말해뒀을 텐데요. 왜 메일이 안 왔죠?
펭돌니임. 그으 마지막 사연 있잖아요오. 누구한테 온 건지 아세요오?
설씨 지금 술 마셨어요? 일도 안 하고?
잘 살라면서요오. 어떻게 살아요. 님은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보란 듯이?
일단 주무세요. 내일 다시 얘기하죠.
펭돌의 전화가 끊겼다. 이게 다 펭귄 때문이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신이 몽롱했다. 얼굴 전체가 시뻘게지는 게 느껴졌다. 알을 놓친 펭귄은 이제 더는 알을 품지 않았다. 대신 눈 뭉치를 품었다. 차가운 눈 뭉치를 마치 알처럼 소중하게 안았다. 짧은 팔로 꼬옥. 나는 반쯤 눈이 감긴 채 이 장면을 본지라 정말 펭귄이 알을 놓치면 이런 행동을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속이 메슥거려 화장실로 향했다. 다큐는 끄지 않았다. 여전히 내레이션은 귀에 박혔다.
눈 뭉치를 품은 수컷 펭귄은 오래도록 아픔을 견딥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안 감은 지 오래되어 떡이 졌고 눈꼬리가 처졌다. 얼굴 전체가 토마토처럼 시뻘겠고 목과 팔이 듬성듬성 부어올랐다. 무심코 욕조를 쳐다보았다. 솜으로 가득 메운 욕조 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그건 알이었다. 펭귄의 알.
나는 조심히 알을 품던 펭귄이 떠올랐다. 알을 꼭 안았다. 알은 딱딱했으며 차가웠다. 눈을 감고 감촉을 느꼈다. 려아가 보고 싶었다. 매일 밤이면 내 품에 꼭 안겨있던 려아가. 려아야, 사실 너 잠자려고 떠난 거 아니잖아. 그냥 내가 싫어져서 그런 거잖아. 더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 그 사연 네가 보낸 거지, 그렇지? 려아는 정말 다시 돌아올까. 귓가에 환청처럼 내레이션이 울렸다.
수컷 펭귄은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개들의 좋은 먹이가 되겠죠.
눈을 번쩍 떴다. 내 옷과 손이 물에 젖었다. 팔과 목에 듬성듬성 부어올랐던 자국은 온데간데없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알은 없었다. 려아도 없었다. 오직 솜을 채운 욕조만이 있을 뿐이었다.
긴긴 겨울잠이 사그라졌다.*
webzine-c-v2 (수정 후)
문학 공모
소설 당선작
너는 겨울잠을 잔다
장아연
[본문 크기 조정]
려아가 떠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욕조를 솜으로 메우는 거였다. 손바닥의 두 배만 한 솜덩어리를 열 개 사 거실 바닥에 널브렸다. 한 덩어리를 잘게 찢고, 또 찢었다. 엉겨 붙였던 솜들이 포슬포슬한 모양이 되었다. 작은 솜에 물을 넣으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솜은 물과 만나면 자신의 몸을 두세 배 불렸다.
라디오 방송처럼 펭돌의 라이브를 켜놓았다. 5시간 30분째 펭돌은 개인 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려아도 이 방송을 보고 있을까. 펭돌이 마지막 사연을 읽었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어쩌면 려아와도.
내가 기억하는 려아는 퇴근하자마자 내게 인사도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적막한 집 안엔 물소리만 들렸다. 처음 려아와 동거를 시작했을 때, 나는 려아가 잘못된 줄 알았다. 놀라 문을 벌컥 여는 불상사를 저지르기도 했다. 려아는 욕조에 몸을 담그다가 당황해 아예 물 안으로 숨어버렸다. 연애 초기에 우리는 비밀과 부끄럼이 많았기에 나는 화장실 문을 꼭 닫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려아는 목욕을 오래 한다.
화장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면 조용히 되뇌었다. 직장인 려아에게 샤워는 하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화장실 안에 김이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아도 려아는 문 한번 열지 않았다. 그저 안개 낀 화장실 안에서 고요를 머금었다. 언제 한번 몰래 화장실 문을 열어 려아를 훔쳐보았다. 인상을 잔뜩 쓰고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욕조 끝에 기대어 누운 려아의 모습이 보였다. 시원한 냄새가 나는 민트 향 비누를 잔뜩 풀어놓고 거품에 코까지 파묻었다. 약 두어 시간 동안 려아의 목욕이 지속되었다. 나는 그 무료한 시간을 화장실 문을 열어 려아를 훔쳐보거나 귀를 대어 려아가 어떤 식으로 피로를 푸는지 상상하며 해소했다. 려아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몸을 물에 녹였다.
려아가 취업에 성공한 건 이력서와 자기소개를 쓴 지 3년이 된 시점이었다. 맨 처음에 쓴 이력서의 잉크는 말라 종이에 완전히 밀착되었고 자기소개는 퇴고에 퇴고를 거쳐 더는 려아의 삶이 들어있지 않았다. 려아의 이상적인 모습을 의인화한 것에 가까웠다. 려아는 이미 영상편집자로 취직해 프리랜서 생활을 영위하는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매일 이력서를 쓰고 넣는 걸 거르지 않았다. 내게 힘들다, 단 한 번도 토로하지 않고 묵묵히 메일을 보냈다. 려아는 아주 나긋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검은 긴 머리를 자주 빗었고 숱이 빽빽한 앞머리는 항상 짧게 잘랐다. 주로 발목을 덮는 원피스를 입었으며 앞코가 동그란 단화를 즐겨 신었다. 내게 말을 걸 때면 늘 다정하게 설아,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지막 사연입니다. 펭귄님이 보내셨네요. 하하, 이것 참. 아무리 제 팬이셔도 그렇지, 이름까지 따라 하시면 됩니까?
펭돌의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렸다. 이제 욕조 안엔 온통 솜뿐이었다. 려아는 없었다. 그 애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짐을 챙겨 떠났으니까. 머릿속엔 온통 활짝 웃으며 머리카락을 살랑이던 려아의 모습뿐이었다. 그날도 려아는 발목을 덮는 검정 원피스를 입었고, 단화를 신었다. 려아에게서 시원한 민트 향이 풍겼다. 나를 설레게 했던 모습 그대로 찾아와 려아는 작별을 고했다. 우린 이별하는 게 아니야, 잠시만. 잠시만 떨어지는 거야. 난 돌아올 거니까. 정말 언젠가는.
안녕하세요, 저는 3년째 애인과 동거하던 사람입니다.
나는 가만히 욕조를 바라보다 움찔했다. 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펭돌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잠을 자고 싶었어요. 겨울잠을요.
겨울잠, 그 단어를 듣자마자 심장이 요동쳤다. 나도 모르게 방송을 꺼버렸다. 려아였다. 그건 려아가 분명했다.
려아는 취직하고 난 뒤 매일 같이 야근을 일삼았다. 나는 려아가 땀에 푹 젖은 블라우스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으면 뒤처리를 했다. 려아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고 싶어, 최소한으로 입을 벌려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묻기도 전에 려아는 내 목덜미를 감싸고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고 려아의 혀가 내 어금니를 쓸었다. 려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대방을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키스로 상황을 무마하려 들었다.
왜 인간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 거야? 왜, 대체 왜…….
려아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나는 려아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려아가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기다렸다.
나는 소파를 등받이 삼아 몸을 기댄 후 텔레비전을 켰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많은 프로그램 속 내 눈에 띈 건 내레이션이 차분한 펭퀸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펭귄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화면 속엔 얼음으로 둘러싸인 남극의 풍경과 삼삼오오 모여 사는 펭귄들이 비쳤다. 카메라는 그중 한 펭귄을 잡았다. 태어난 지 40일도 되지 않은 아기 펭귄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기 펭귄은 아직 체온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곧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눈발은 거세지고, 아기 펭귄의 여린 털 위에 눈이 쌓인다. 아기 펭귄은 아무 수컷 품에 파고들어 갔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자기 새끼가 아님을 눈치챈 펭귄은 아기 펭귄을 밀어내고 부리로 쪼아 쫓아냈다.
이제 아기 펭귄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아기 펭귄은 죽고 마는가. 눈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아기 펭귄은 수컷 찾길 포기했다. 아주 자그마한 펭귄이 점점 눈에 파묻혔다. 펭귄의 목 주변까지 눈으로 뒤덮이기 직전, 수컷이 아기 펭귄을 감싸 안았다.
이 경험을 통해 아기 펭귄은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수컷과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말이죠.
뒤이어 내레이션이 들렸다. 나는 안도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손톱 주변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트북을 켰다. 려아가 떠난 걸 떠올리면 내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지만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영화과를 졸업한 내겐 구린 영화를 거르는 법과 빠르게 영상을 처리하는 편집 실력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택한 일은 개인 방송가 펭돌의 밑에서 일하는 거다. 1인 개인 방송 라이브가 끝나면 서너 시간가량 되는 영상을 펭돌이 원하는 만큼 쪼개 재밌게 편집하는 일이었다. 려아는 펭돌을 좋아했다. 속 시원하게 말도 잘하고 재미있다고. 가끔 펭돌의 라이브도 챙겨보았고 대부분 편집된 영상을 계속 다시 보았다. 내가 편집한 영상들은 려아의 눈에 담겼다. 려아는 까르르 웃어대며 내 손으로 재배치한 영상을 좋아했다.
귓가엔 펭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사연을 읽었다. 나는 손을 바삐 움직여 40분이 넘어가는 첫 번째 영상을 6~7분으로 줄이는 작업을 했다.
이제 그 사람은 애인이 아니지만요. 아니, 저는 돌아갈 거지만. 저는 겨울잠이 끝나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거거든요. 제 애인이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난 잠이 필요해, 수면 말이야. 귓가에 려아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속에서 무언가 끓는 듯했다. 볼륨을 올렸다. 사연을 다 읽은 펭돌은 한참을 침묵했다.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뿌예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굳어버렸다.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귀를 열었다.
사연자분. 아니, 펭귄님. 뭐 어쩌자는 겁니까? 자, 다시 읽어봅시다. 겨울잠을 자고 싶어서 애인을 떠났다……. 이게 뭔 개소리입니까?
냉동고에 깊숙이 잠들어있던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잔은 없었다. 뚜껑을 따 음료수처럼 꿀떡꿀떡 마셨다. 천천히 취기가 올라왔다.
펭귄님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애인은 막 기다리고 자시고 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강아지예요? 잘 살겠죠. 님이 떠나갔으니까 더 잘 살아야죠. 그게 펭귄님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펭돌은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려아는 내게 떠나겠다고 언질을 줬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펭돌의 말을 부정해 보았지만 나는 절실히 알았다. 려아 또한 내게 당일이 되어서야 떠난다는 사실을 고백했으며 그전까진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걸. 그러니까 내게 한 말은 일종의 통보였다.
너는 나랑 있는 게 지긋지긋했어?
려아는 눈물이 그렁한 채로 있는 나를 보며 짐짓 당황하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여태껏 회사에 출근하는 내내 썼던 사퇴서가 있다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다. 려아는 가방을 뒤집어 보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건 포효에 가까웠다. 흰 봉투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흰 눈 같았다. 려아에겐 잠이 필요했다. 겨울잠, 하지만 려아. 펭귄은 겨울잠을 자지 않아, 그건 너도 알잖아?
그리고 이 방송 보실지 모르겠지만 펭귄님 애인 분. 이런 사람 사랑해서 뭐합니까? 사랑이 장난이에요? 그냥 다 지우시고 홀로서기 하시죠. 누구보다 잘 사세요. 아셨죠?
소주를 들이켰다. 당신이 뭘 알아, 려아는 돌아올 거야. 나와 약속했는걸. 볼이 붉어지고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었다. 아까 다 못 본 펭귄 다큐를 틀었다.
한 펭귄이 있다. 곧 태어날 펭귄의 알을 발밑에 조심히 쥐고 있는 펭귄. 이 펭귄은 알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꼿꼿이 서서 잠을 자고 부리로 알을 건드려보기도 한다. 내레이션은 말한다.
이 알은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조금만 펭귄의 품에서 벗어나도 얼어버리고 맙니다.
펭귄은 혹여 알을 놓칠세라 소중히 품는다. 소주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 이 하나하나가 시원해졌다. 조심히 알을 다루던 아빠 펭귄이 실수로 알을 놓친다. 급히 다시 알을 주워 품어보지만 이미 알은 제 기능을 잃는다. 안에 잠들어있던 새끼는 죽었고 펭귄은 끝없이 알을 품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펭돌의 전화였다. 나는 다큐를 멈추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아니, 설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합니까? 제가 분명 영상 새벽까지 보내달라고 늘 말해뒀을 텐데요. 왜 메일이 안 왔죠?
펭돌니임. 그으 마지막 사연 있잖아요오. 누구한테 온 건지 아세요오?
설씨 지금 술 마셨어요? 일도 안 하고?
잘 살라면서요오. 어떻게 살아요. 님은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보란 듯이?
일단 주무세요. 내일 다시 얘기하죠.
펭돌의 전화가 끊겼다. 이게 다 펭귄 때문이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신이 몽롱했다. 얼굴 전체가 시뻘게지는 게 느껴졌다. 알을 놓친 펭귄은 이제 더는 알을 품지 않았다. 대신 눈 뭉치를 품었다. 차가운 눈 뭉치를 마치 알처럼 소중하게 안았다. 짧은 팔로 꼬옥. 나는 반쯤 눈이 감긴 채 이 장면을 본지라 정말 펭귄이 알을 놓치면 이런 행동을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속이 메슥거려 화장실로 향했다. 다큐는 끄지 않았다. 여전히 내레이션은 귀에 박혔다.
눈 뭉치를 품은 수컷 펭귄은 오래도록 아픔을 견딥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안 감은 지 오래되어 떡이 졌고 눈꼬리가 처졌다. 얼굴 전체가 토마토처럼 시뻘겠고 목과 팔이 듬성듬성 부어올랐다. 무심코 욕조를 쳐다보았다. 솜으로 가득 메운 욕조 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그건 알이었다. 펭귄의 알.
나는 조심히 알을 품던 펭귄이 떠올랐다. 알을 꼭 안았다. 알은 딱딱했으며 차가웠다. 눈을 감고 감촉을 느꼈다. 려아가 보고 싶었다. 매일 밤이면 내 품에 꼭 안겨있던 려아가. 려아야, 사실 너 잠자려고 떠난 거 아니잖아. 그냥 내가 싫어져서 그런 거잖아. 더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 그 사연 네가 보낸 거지, 그렇지? 려아는 정말 다시 돌아올까. 귓가에 환청처럼 내레이션이 울렸다.
수컷 펭귄은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개들의 좋은 먹이가 되겠죠.
눈을 번쩍 떴다. 내 옷과 손이 물에 젖었다. 팔과 목에 듬성듬성 부어올랐던 자국은 온데간데없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알은 없었다. 려아도 없었다. 오직 솜을 채운 욕조만이 있을 뿐이었다.
긴긴 겨울잠이 사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