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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모

소설 당선작

너는 겨울잠을 잔다

장아연

마지막 사연입니다. 펭귄님이 보내셨네요. 하하, 이것 참. 아무리 제 팬이셔도 그렇지, 이름까지 따라 하시면 됩니까?
펭돌의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렸다. 이제 욕조 안엔 온통 솜뿐이었다. 려아는 없었다. 그 애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짐을 챙겨 떠났으니까. 머릿속엔 온통 활짝 웃으며 머리카락을 살랑이던 려아의 모습뿐이었다. 그날도 려아는 발목을 덮는 검정 원피스를 입었고, 단화를 신었다. 려아에게서 시원한 민트 향이 풍겼다. 나를 설레게 했던 모습 그대로 찾아와 려아는 작별을 고했다. 우린 이별하는 게 아니야, 잠시만. 잠시만 떨어지는 거야. 난 돌아올 거니까. 정말 언젠가는.
안녕하세요, 저는 3년째 애인과 동거하던 사람입니다.
나는 가만히 욕조를 바라보다 움찔했다. 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펭돌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잠을 자고 싶었어요. 겨울잠을요.
겨울잠, 그 단어를 듣자마자 심장이 요동쳤다. 나도 모르게 방송을 꺼버렸다. 려아였다. 그건 려아가 분명했다.
려아는 취직하고 난 뒤 매일 같이 야근을 일삼았다. 나는 려아가 땀에 푹 젖은 블라우스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으면 뒤처리를 했다. 려아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고 싶어, 최소한으로 입을 벌려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묻기도 전에 려아는 내 목덜미를 감싸고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고 려아의 혀가 내 어금니를 쓸었다. 려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대방을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키스로 상황을 무마하려 들었다.
왜 인간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 거야? 왜, 대체 왜…….
려아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나는 려아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려아가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기다렸다.
나는 소파를 등받이 삼아 몸을 기댄 후 텔레비전을 켰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많은 프로그램 속 내 눈에 띈 건 내레이션이 차분한 펭퀸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펭귄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화면 속엔 얼음으로 둘러싸인 남극의 풍경과 삼삼오오 모여 사는 펭귄들이 비쳤다. 카메라는 그중 한 펭귄을 잡았다. 태어난 지 40일도 되지 않은 아기 펭귄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기 펭귄은 아직 체온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곧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눈발은 거세지고, 아기 펭귄의 여린 털 위에 눈이 쌓인다. 아기 펭귄은 아무 수컷 품에 파고들어 갔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자기 새끼가 아님을 눈치챈 펭귄은 아기 펭귄을 밀어내고 부리로 쪼아 쫓아냈다.
이제 아기 펭귄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아기 펭귄은 죽고 마는가. 눈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아기 펭귄은 수컷 찾길 포기했다. 아주 자그마한 펭귄이 점점 눈에 파묻혔다. 펭귄의 목 주변까지 눈으로 뒤덮이기 직전, 수컷이 아기 펭귄을 감싸 안았다.
이 경험을 통해 아기 펭귄은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수컷과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말이죠.
뒤이어 내레이션이 들렸다. 나는 안도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손톱 주변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트북을 켰다. 려아가 떠난 걸 떠올리면 내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지만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영화과를 졸업한 내겐 구린 영화를 거르는 법과 빠르게 영상을 처리하는 편집 실력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택한 일은 개인 방송가 펭돌의 밑에서 일하는 거다. 1인 개인 방송 라이브가 끝나면 서너 시간가량 되는 영상을 펭돌이 원하는 만큼 쪼개 재밌게 편집하는 일이었다. 려아는 펭돌을 좋아했다. 속 시원하게 말도 잘하고 재미있다고. 가끔 펭돌의 라이브도 챙겨보았고 대부분 편집된 영상을 계속 다시 보았다. 내가 편집한 영상들은 려아의 눈에 담겼다. 려아는 까르르 웃어대며 내 손으로 재배치한 영상을 좋아했다.
귓가엔 펭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사연을 읽었다. 나는 손을 바삐 움직여 40분이 넘어가는 첫 번째 영상을 6~7분으로 줄이는 작업을 했다.
이제 그 사람은 애인이 아니지만요. 아니, 저는 돌아갈 거지만. 저는 겨울잠이 끝나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거거든요. 제 애인이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난 잠이 필요해, 수면 말이야. 귓가에 려아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속에서 무언가 끓는 듯했다. 볼륨을 올렸다. 사연을 다 읽은 펭돌은 한참을 침묵했다.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뿌예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굳어버렸다.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귀를 열었다.
사연자분. 아니, 펭귄님. 뭐 어쩌자는 겁니까? 자, 다시 읽어봅시다. 겨울잠을 자고 싶어서 애인을 떠났다……. 이게 뭔 개소리입니까?
냉동고에 깊숙이 잠들어있던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잔은 없었다. 뚜껑을 따 음료수처럼 꿀떡꿀떡 마셨다. 천천히 취기가 올라왔다.
펭귄님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애인은 막 기다리고 자시고 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강아지예요? 잘 살겠죠. 님이 떠나갔으니까 더 잘 살아야죠. 그게 펭귄님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펭돌은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려아는 내게 떠나겠다고 언질을 줬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펭돌의 말을 부정해 보았지만 나는 절실히 알았다. 려아 또한 내게 당일이 되어서야 떠난다는 사실을 고백했으며 그전까진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걸. 그러니까 내게 한 말은 일종의 통보였다.
너는 나랑 있는 게 지긋지긋했어?
려아는 눈물이 그렁한 채로 있는 나를 보며 짐짓 당황하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여태껏 회사에 출근하는 내내 썼던 사퇴서가 있다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다. 려아는 가방을 뒤집어 보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건 포효에 가까웠다. 흰 봉투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흰 눈 같았다. 려아에겐 잠이 필요했다. 겨울잠, 하지만 려아. 펭귄은 겨울잠을 자지 않아, 그건 너도 알잖아?
그리고 이 방송 보실지 모르겠지만 펭귄님 애인 분. 이런 사람 사랑해서 뭐합니까? 사랑이 장난이에요? 그냥 다 지우시고 홀로서기 하시죠. 누구보다 잘 사세요. 아셨죠?
소주를 들이켰다. 당신이 뭘 알아, 려아는 돌아올 거야. 나와 약속했는걸. 볼이 붉어지고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었다. 아까 다 못 본 펭귄 다큐를 틀었다.
한 펭귄이 있다. 곧 태어날 펭귄의 알을 발밑에 조심히 쥐고 있는 펭귄. 이 펭귄은 알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꼿꼿이 서서 잠을 자고 부리로 알을 건드려보기도 한다. 내레이션은 말한다.
이 알은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조금만 펭귄의 품에서 벗어나도 얼어버리고 맙니다.
펭귄은 혹여 알을 놓칠세라 소중히 품는다. 소주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 이 하나하나가 시원해졌다. 조심히 알을 다루던 아빠 펭귄이 실수로 알을 놓친다. 급히 다시 알을 주워 품어보지만 이미 알은 제 기능을 잃는다. 안에 잠들어있던 새끼는 죽었고 펭귄은 끝없이 알을 품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펭돌의 전화였다. 나는 다큐를 멈추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아니, 설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합니까? 제가 분명 영상 새벽까지 보내달라고 늘 말해뒀을 텐데요. 왜 메일이 안 왔죠?
펭돌니임. 그으 마지막 사연 있잖아요오. 누구한테 온 건지 아세요오?
설씨 지금 술 마셨어요? 일도 안 하고?
잘 살라면서요오. 어떻게 살아요. 님은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보란 듯이?
일단 주무세요. 내일 다시 얘기하죠.
펭돌의 전화가 끊겼다. 이게 다 펭귄 때문이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신이 몽롱했다. 얼굴 전체가 시뻘게지는 게 느껴졌다. 알을 놓친 펭귄은 이제 더는 알을 품지 않았다. 대신 눈 뭉치를 품었다. 차가운 눈 뭉치를 마치 알처럼 소중하게 안았다. 짧은 팔로 꼬옥. 나는 반쯤 눈이 감긴 채 이 장면을 본지라 정말 펭귄이 알을 놓치면 이런 행동을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속이 메슥거려 화장실로 향했다. 다큐는 끄지 않았다. 여전히 내레이션은 귀에 박혔다.
눈 뭉치를 품은 수컷 펭귄은 오래도록 아픔을 견딥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안 감은 지 오래되어 떡이 졌고 눈꼬리가 처졌다. 얼굴 전체가 토마토처럼 시뻘겠고 목과 팔이 듬성듬성 부어올랐다. 무심코 욕조를 쳐다보았다. 솜으로 가득 메운 욕조 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그건 알이었다. 펭귄의 알.
나는 조심히 알을 품던 펭귄이 떠올랐다. 알을 꼭 안았다. 알은 딱딱했으며 차가웠다. 눈을 감고 감촉을 느꼈다. 려아가 보고 싶었다. 매일 밤이면 내 품에 꼭 안겨있던 려아가. 려아야, 사실 너 잠자려고 떠난 거 아니잖아. 그냥 내가 싫어져서 그런 거잖아. 더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 그 사연 네가 보낸 거지, 그렇지? 려아는 정말 다시 돌아올까. 귓가에 환청처럼 내레이션이 울렸다.
수컷 펭귄은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개들의 좋은 먹이가 되겠죠.
눈을 번쩍 떴다. 내 옷과 손이 물에 젖었다. 팔과 목에 듬성듬성 부어올랐던 자국은 온데간데없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알은 없었다. 려아도 없었다. 오직 솜을 채운 욕조만이 있을 뿐이었다.
긴긴 겨울잠이 사그라졌다.*

웹진

Vol.1
202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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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박관우, 《증인과 증언들》 워크숍 참여자 모집

문화살롱 5120 에서 종합예술웹진 『놀』을 창간합니다. 『놀』을 함께 만들어갈 다양한 색깔의 원고를 공모합니다. 주제와 형식은 자유롭습니다. 예술을 향유하고 사랑하는 모든 청년 예술인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모집 분야
웹진에 게재 가능한 텍스트 원고

공모 기간
2023년 9월 13일 ~ 2023년 10월 3일

공모 대상
웹진 『놀』에 자신의 글을 싣고 싶은 누구나 (만 39세 이하 청년 작가/노원구 거주 또는 노원 소재 대학 재학 혹은 졸업자 가산점 부여, ※ 관련 서류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당선작 지원사항
웹진 『놀』에 원고 게재(웹진 원고 일부는 선별하여 2026년 단행본 출판 예정) 게재 원고료 지급: 200자 원고지 기준 1매당 1만원(시는 1편당 7만원) 예정
원고 분량
산문의 경우 200자 원고지 15~30매
시 최소 2편 이상
필수 제출 서류
1) 문화살롱 5120 원고 공모 지원서
2) 개인정보 수집·이용 동의서
3) 1차 완성된 원고(당선 이후 온라인 출판 예정일까지 퇴고 가능)
지원 방법
문화살롱 이메일(culturesalon5120@gmail.com)로 제출 자료 첨부 후 발신
신청자 발표
개별연락 (2023년 10월 말~ 11월 초 예정)
기타 사항
선정 이후 표절 및 기타 기고 불가 사유 발생 시 선정 취소될 수 있습니다.
지원서 다운로드
https://bitly.ws/U2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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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겨울잠을 잔다

장아연

려아가 떠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욕조를 솜으로 메우는 거였다. 손바닥의 두 배만 한 솜덩어리를 열 개 사 거실 바닥에 널브렸다. 한 덩어리를 잘게 찢고, 또 찢었다. 엉겨 붙였던 솜들이 포슬포슬한 모양이 되었다. 작은 솜에 물을 넣으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솜은 물과 만나면 자신의 몸을 두세 배 불렸다.
라디오 방송처럼 펭돌의 라이브를 켜놓았다. 5시간 30분째 펭돌은 개인 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려아도 이 방송을 보고 있을까. 펭돌이 마지막 사연을 읽었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어쩌면 려아와도.
내가 기억하는 려아는 퇴근하자마자 내게 인사도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적막한 집 안엔 물소리만 들렸다. 처음 려아와 동거를 시작했을 때, 나는 려아가 잘못된 줄 알았다. 놀라 문을 벌컥 여는 불상사를 저지르기도 했다. 려아는 욕조에 몸을 담그다가 당황해 아예 물 안으로 숨어버렸다. 연애 초기에 우리는 비밀과 부끄럼이 많았기에 나는 화장실 문을 꼭 닫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려아는 목욕을 오래 한다.
화장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면 조용히 되뇌었다. 직장인 려아에게 샤워는 하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화장실 안에 김이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아도 려아는 문 한번 열지 않았다. 그저 안개 낀 화장실 안에서 고요를 머금었다. 언제 한번 몰래 화장실 문을 열어 려아를 훔쳐보았다. 인상을 잔뜩 쓰고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욕조 끝에 기대어 누운 려아의 모습이 보였다. 시원한 냄새가 나는 민트 향 비누를 잔뜩 풀어놓고 거품에 코까지 파묻었다. 약 두어 시간 동안 려아의 목욕이 지속되었다. 나는 그 무료한 시간을 화장실 문을 열어 려아를 훔쳐보거나 귀를 대어 려아가 어떤 식으로 피로를 푸는지 상상하며 해소했다. 려아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몸을 물에 녹였다.
려아가 취업에 성공한 건 이력서와 자기소개를 쓴 지 3년이 된 시점이었다. 맨 처음에 쓴 이력서의 잉크는 말라 종이에 완전히 밀착되었고 자기소개는 퇴고에 퇴고를 거쳐 더는 려아의 삶이 들어있지 않았다. 려아의 이상적인 모습을 의인화한 것에 가까웠다. 려아는 이미 영상편집자로 취직해 프리랜서 생활을 영위하는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매일 이력서를 쓰고 넣는 걸 거르지 않았다. 내게 힘들다, 단 한 번도 토로하지 않고 묵묵히 메일을 보냈다. 려아는 아주 나긋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검은 긴 머리를 자주 빗었고 숱이 빽빽한 앞머리는 항상 짧게 잘랐다. 주로 발목을 덮는 원피스를 입었으며 앞코가 동그란 단화를 즐겨 신었다. 내게 말을 걸 때면 늘 다정하게 설아,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지막 사연입니다. 펭귄님이 보내셨네요. 하하, 이것 참. 아무리 제 팬이셔도 그렇지, 이름까지 따라 하시면 됩니까?
펭돌의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렸다. 이제 욕조 안엔 온통 솜뿐이었다. 려아는 없었다. 그 애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짐을 챙겨 떠났으니까. 머릿속엔 온통 활짝 웃으며 머리카락을 살랑이던 려아의 모습뿐이었다. 그날도 려아는 발목을 덮는 검정 원피스를 입었고, 단화를 신었다. 려아에게서 시원한 민트 향이 풍겼다. 나를 설레게 했던 모습 그대로 찾아와 려아는 작별을 고했다. 우린 이별하는 게 아니야, 잠시만. 잠시만 떨어지는 거야. 난 돌아올 거니까. 정말 언젠가는.
안녕하세요, 저는 3년째 애인과 동거하던 사람입니다.
나는 가만히 욕조를 바라보다 움찔했다. 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펭돌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잠을 자고 싶었어요. 겨울잠을요.
겨울잠, 그 단어를 듣자마자 심장이 요동쳤다. 나도 모르게 방송을 꺼버렸다. 려아였다. 그건 려아가 분명했다.
려아는 취직하고 난 뒤 매일 같이 야근을 일삼았다. 나는 려아가 땀에 푹 젖은 블라우스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으면 뒤처리를 했다. 려아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고 싶어, 최소한으로 입을 벌려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묻기도 전에 려아는 내 목덜미를 감싸고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고 려아의 혀가 내 어금니를 쓸었다. 려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대방을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키스로 상황을 무마하려 들었다.
왜 인간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 거야? 왜, 대체 왜…….
려아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나는 려아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려아가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기다렸다.
나는 소파를 등받이 삼아 몸을 기댄 후 텔레비전을 켰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많은 프로그램 속 내 눈에 띈 건 내레이션이 차분한 펭퀸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펭귄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화면 속엔 얼음으로 둘러싸인 남극의 풍경과 삼삼오오 모여 사는 펭귄들이 비쳤다. 카메라는 그중 한 펭귄을 잡았다. 태어난 지 40일도 되지 않은 아기 펭귄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기 펭귄은 아직 체온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곧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눈발은 거세지고, 아기 펭귄의 여린 털 위에 눈이 쌓인다. 아기 펭귄은 아무 수컷 품에 파고들어 갔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자기 새끼가 아님을 눈치챈 펭귄은 아기 펭귄을 밀어내고 부리로 쪼아 쫓아냈다.
이제 아기 펭귄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아기 펭귄은 죽고 마는가. 눈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아기 펭귄은 수컷 찾길 포기했다. 아주 자그마한 펭귄이 점점 눈에 파묻혔다. 펭귄의 목 주변까지 눈으로 뒤덮이기 직전, 수컷이 아기 펭귄을 감싸 안았다.
이 경험을 통해 아기 펭귄은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수컷과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말이죠.
뒤이어 내레이션이 들렸다. 나는 안도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손톱 주변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트북을 켰다. 려아가 떠난 걸 떠올리면 내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지만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영화과를 졸업한 내겐 구린 영화를 거르는 법과 빠르게 영상을 처리하는 편집 실력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택한 일은 개인 방송가 펭돌의 밑에서 일하는 거다. 1인 개인 방송 라이브가 끝나면 서너 시간가량 되는 영상을 펭돌이 원하는 만큼 쪼개 재밌게 편집하는 일이었다. 려아는 펭돌을 좋아했다. 속 시원하게 말도 잘하고 재미있다고. 가끔 펭돌의 라이브도 챙겨보았고 대부분 편집된 영상을 계속 다시 보았다. 내가 편집한 영상들은 려아의 눈에 담겼다. 려아는 까르르 웃어대며 내 손으로 재배치한 영상을 좋아했다.
귓가엔 펭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사연을 읽었다. 나는 손을 바삐 움직여 40분이 넘어가는 첫 번째 영상을 6~7분으로 줄이는 작업을 했다.
이제 그 사람은 애인이 아니지만요. 아니, 저는 돌아갈 거지만. 저는 겨울잠이 끝나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거거든요. 제 애인이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난 잠이 필요해, 수면 말이야. 귓가에 려아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속에서 무언가 끓는 듯했다. 볼륨을 올렸다. 사연을 다 읽은 펭돌은 한참을 침묵했다.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뿌예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굳어버렸다.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귀를 열었다.
사연자분. 아니, 펭귄님. 뭐 어쩌자는 겁니까? 자, 다시 읽어봅시다. 겨울잠을 자고 싶어서 애인을 떠났다……. 이게 뭔 개소리입니까?
냉동고에 깊숙이 잠들어있던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잔은 없었다. 뚜껑을 따 음료수처럼 꿀떡꿀떡 마셨다. 천천히 취기가 올라왔다.
펭귄님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애인은 막 기다리고 자시고 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강아지예요? 잘 살겠죠. 님이 떠나갔으니까 더 잘 살아야죠. 그게 펭귄님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펭돌은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려아는 내게 떠나겠다고 언질을 줬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펭돌의 말을 부정해 보았지만 나는 절실히 알았다. 려아 또한 내게 당일이 되어서야 떠난다는 사실을 고백했으며 그전까진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걸. 그러니까 내게 한 말은 일종의 통보였다.
너는 나랑 있는 게 지긋지긋했어?
려아는 눈물이 그렁한 채로 있는 나를 보며 짐짓 당황하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여태껏 회사에 출근하는 내내 썼던 사퇴서가 있다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다. 려아는 가방을 뒤집어 보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건 포효에 가까웠다. 흰 봉투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흰 눈 같았다. 려아에겐 잠이 필요했다. 겨울잠, 하지만 려아. 펭귄은 겨울잠을 자지 않아, 그건 너도 알잖아?
그리고 이 방송 보실지 모르겠지만 펭귄님 애인 분. 이런 사람 사랑해서 뭐합니까? 사랑이 장난이에요? 그냥 다 지우시고 홀로서기 하시죠. 누구보다 잘 사세요. 아셨죠?
소주를 들이켰다. 당신이 뭘 알아, 려아는 돌아올 거야. 나와 약속했는걸. 볼이 붉어지고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었다. 아까 다 못 본 펭귄 다큐를 틀었다.

한 펭귄이 있다. 곧 태어날 펭귄의 알을 발밑에 조심히 쥐고 있는 펭귄. 이 펭귄은 알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꼿꼿이 서서 잠을 자고 부리로 알을 건드려보기도 한다. 내레이션은 말한다.
이 알은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조금만 펭귄의 품에서 벗어나도 얼어버리고 맙니다.
펭귄은 혹여 알을 놓칠세라 소중히 품는다. 소주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 이 하나하나가 시원해졌다. 조심히 알을 다루던 아빠 펭귄이 실수로 알을 놓친다. 급히 다시 알을 주워 품어보지만 이미 알은 제 기능을 잃는다. 안에 잠들어있던 새끼는 죽었고 펭귄은 끝없이 알을 품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펭돌의 전화였다. 나는 다큐를 멈추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아니, 설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합니까? 제가 분명 영상 새벽까지 보내달라고 늘 말해뒀을 텐데요. 왜 메일이 안 왔죠?
펭돌니임. 그으 마지막 사연 있잖아요오. 누구한테 온 건지 아세요오?
설씨 지금 술 마셨어요? 일도 안 하고?
잘 살라면서요오. 어떻게 살아요. 님은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보란 듯이?
일단 주무세요. 내일 다시 얘기하죠.
펭돌의 전화가 끊겼다. 이게 다 펭귄 때문이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신이 몽롱했다. 얼굴 전체가 시뻘게지는 게 느껴졌다. 알을 놓친 펭귄은 이제 더는 알을 품지 않았다. 대신 눈 뭉치를 품었다. 차가운 눈 뭉치를 마치 알처럼 소중하게 안았다. 짧은 팔로 꼬옥. 나는 반쯤 눈이 감긴 채 이 장면을 본지라 정말 펭귄이 알을 놓치면 이런 행동을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속이 메슥거려 화장실로 향했다. 다큐는 끄지 않았다. 여전히 내레이션은 귀에 박혔다.
눈 뭉치를 품은 수컷 펭귄은 오래도록 아픔을 견딥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안 감은 지 오래되어 떡이 졌고 눈꼬리가 처졌다. 얼굴 전체가 토마토처럼 시뻘겠고 목과 팔이 듬성듬성 부어올랐다. 무심코 욕조를 쳐다보았다. 솜으로 가득 메운 욕조 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그건 알이었다. 펭귄의 알.
나는 조심히 알을 품던 펭귄이 떠올랐다. 알을 꼭 안았다. 알은 딱딱했으며 차가웠다. 눈을 감고 감촉을 느꼈다. 려아가 보고 싶었다. 매일 밤이면 내 품에 꼭 안겨있던 려아가. 려아야, 사실 너 잠자려고 떠난 거 아니잖아. 그냥 내가 싫어져서 그런 거잖아. 더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 그 사연 네가 보낸 거지, 그렇지? 려아는 정말 다시 돌아올까. 귓가에 환청처럼 내레이션이 울렸다.
수컷 펭귄은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개들의 좋은 먹이가 되겠죠.
눈을 번쩍 떴다. 내 옷과 손이 물에 젖었다. 팔과 목에 듬성듬성 부어올랐던 자국은 온데간데없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알은 없었다. 려아도 없었다. 오직 솜을 채운 욕조만이 있을 뿐이었다.
긴긴 겨울잠이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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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ned Pattern

salon51

문화살롱 5120 2023 전시공모 선정작가전

《펜드 패턴 Penned Pattern》

≪펜드 패턴 Penned Pattern≫

24.05.24-24.07.06

참여작가 | 임하은 조현민
관람시간 | 화-토, 오전 10시-오후 7시(일요일, 월요일 휴관 / 공휴일 휴관)
※ 휠체어 접근이 가능합니다(미리 연락 부탁드립니다).
오프닝 | 2024년 2월 8일(목) 오후 5시
※ 전시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가능합니다.
전시 사진 | 이동웅
문의 | 02-948-1217 / culturesalon5120@gmail.com

시선과 화면이 자아내는 원경과 근경의 하모니

≪펜드 패턴 Penned Pattern≫은 지난해 시작된 문화살롱 5120의 첫 번째 전시 공모에 당선된 임하은, 조현민 작가의 2인전이다. 제목은 회화의 도구이기도 한 ‘pen’의 동사형 의미 ‘(문학) 작품을 쓰거나 작곡하는 것’ 또는 ‘작은 공간에 무언가를 둘러싸거나 가두는 것’의 의미를 가진 ‘펜드’, 그리고 두 작가의 조형 세계에 있어서 공통되는 요소인 ‘패턴’에 주목하여 탄생하였다. 임하은이 제주 한 달 살기의 경험에서 주목한 경작지에 남겨진 트랙터의 흔적과 조현민이 대상의 사진으로 포착하여 캔버스의 평면에 옮겨 놓은 패턴이 그것이다.

임하은은 이번 전시에서 관광지의 홍보물이 관광객의 이목을 끌고자 사용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 방식, 그 형식적 화법을 활용한다. 변형 판넬, 현수막, 전단지, 기념품 진열장 등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의 전유는 여행이라는 삶의 영역과 예술의 경계가 중첩되면서 휴양지에서의 유쾌한 경험의 느낌을 환기한다.

전작에서 대상에 떨어지는 그림자의 구성을 평면의 언어로 풀어내 왔던 조현민은 이번 전시에서 일상의 대상을 사진으로 포착하여 패턴을 추출하고 캔버스 평면에 옮긴다. 얼핏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회화는 단순한 패턴의 반복과 대비되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인식의 전환을 유도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가의 회화적 형식 실험은 관객의 즐거운 유희로 전도된다.

두 작가의 이번 전시는 지난 11월부터 문화살롱 5120에서 열린 2023년 전시공모 선정작가 프리뷰 전시에 뒤이어 개최되었다. 두 전시의 사이에 불과 몇 개월의 시간이 있었을 뿐이지만 시작하는 예술가의 열정과 탐구심은 단기간에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심화된 작업 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자연(임하은)과 고개를 숙여 마주하는 대상(조현민)의 화음 속에서 앞으로 발전해 나갈 이들의 예술 세계에 대한 기대가 함께 피어오른다.

배혜정 문화살롱 5120 디렉터


≪We can take a shower together, If you want.≫ 24.05.24-24.07.06

문화살롱 5120 2023 전시공모 선정작가전

《We can take a shower together, If you want.》

24.05.24-24.07.06

참여작가 | 공재
관람시간 | 화-토, 오전 10시-오후 7시(일요일, 월요일 휴관 / 공휴일 휴관)
※ 휠체어 접근이 가능합니다(미리 연락 부탁드립니다).
오프닝 | 2024년 5월 24일(금) 오후 6시 30분
전시 사진|이동웅
포스터 디자인 | 원정인
문의 | 02-948-1217 / culturesalon5120@gmail.com

삶과 예술, 기억과 흔적 – 그 그림자로서의 예술

단 하나의 선도 그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난 지금 순간처럼 위대한 화가인 적은 없었지..아아, 내 안에 충만하고 따스하게 살아 있는 것을 종이 위에 살려 낼 수 있다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요한 폰 괴테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가? 예술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어서 플라톤에게서 예술은 세계의 모사본으로 정의되었다.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오던 예술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낭만주의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이 인간의 내면, 즉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후 예술(내지 예술에 대한 규정)은 재현과 표현의 문제를 넘어 그 정의 자체를 회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가? 예고 시절부터 조각을 전공해 온 공재의 첫 개인전 《We can take a shower together, If you want.》는 예술과 삶, 기억과 신념, 예술가와 인간 그 사이를 멤돈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모티브들은 작가가 경험한 사건들과 그 순간의 작가 자신, 그리고 작품으로 화(化)하는 현재이다. 전시의 제목이 되기도 한 〈We can take a shower together, If you want.〉는 작가의 태국여행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기차에서 만나 친구가 된 한 태국인이 작가를 집에 초대해서는 씻으라며 건넨 한 마디가 바로 이 말이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의 눈빛에 상대는 멋쩍게 자리를 떳지만 작가는 전에 없을 속도로 씻으면서 어떻게 그 집을 빠져나갈지만을 궁리했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작품이 탄생했다. 이 인간적 경험이 예술이 되는 순간은 소재가 작품으로 선택된 순간을 넘어 그가 형상화한 사건의 조형 과정에서 벌어지는 두 번째의 사건에서 비롯한다. 원형을 만들어 석고를 뜨고 난 뒤 갈라지고 깨진 채 남겨진, 원형을 이루던 흙의 파편이 그에게는 더 기억의 본성에 닿아 있는 듯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기억의 형상을 마치 오래된 유물인 양 깨지고 헐어 원형을 알 수 없고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으로, 마치 기억이 퇴색되듯이 그러한 것으로 남겼다.

이 전시에서 주목할 점의 하나는 바닥에 포진한 작품들이다. 입구를 들어서서 만나게 되는 납작한 발바닥, 전시장 중앙을 가득 메운 사과 오브제들은 기존의 조각이 의례 구성하던 수직의 시선축을 수평으로, 아주 낮은 수평 축으로 옮겨 놓았다. 뿐만 아니라 이 납작한, 바닥의 형상들은 관람객의 관람 동선을 엄격히 제한한다. 이리저리 놓인 오브제들 사이에서 우리의 몸은 걷기를 제한받고 좁은 공간으로 몰리며 발걸음을 조심하게 된다. 여기서 관람객의 신체는 작가가 경험한 몸의 경험을 옮겨 놓은 것1)이자 그가 경험한 대상들의 자취를 연상케 하는 동선에 강제된다. 수건이 걸려있는 벽과 바닥에 놓인 오브제들 사이에서 우리는 좁은 욕실에서 신체의 움직임이 제한되는 경험을 몸으로 떠올리게 되고 갈 지(之)자로 배열된 배치를 통해 인도의 한 도시에서 큰 제한 없이 거리를 누비는 소들의 움직임을 따라 걷게 되기 때문이다. 이로서 관람객은 재현된 내용의 인식으로서의 관람이 아니라 관람의 행위에서 발생하는 경험으로 작가의 시간과 경험 또 기억에 연결된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래서 예술가 공재는 무엇을 하는가? 괴테가 그린 청년 베르테르에게 삶과 사랑은 예술처럼 섬세하게 다뤄야하는 것이자 예술이 그렇듯 삶 또한 버거운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삶과 예술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작하는 예술가인 공재에게 예술은 삶을 구성하는 것이자 삶과 일치되는 것인 듯하다. 그것이 그가 다루는 기억과 경험의 결을 기억하고 다음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1) 작가 인터뷰 참조.

배혜정 문화살롱 5120 디렉터


작가노트, 쓰기

THE SALON

작가노트, 쓰기

작업의 좋은 조력자, 작가노트 쓰기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업이지만, 잘 쓴 작가노트는 활동하는 데에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비평문 이전에 작품에 관한 1차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포트폴리오, 각종 공모 지원, 전시와 언론 매체 인용 등 다양한 곳에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비평문과는 별도로 작품과 관련된 내밀하고 개인적인 면을 드러내며 더 풍부한 작품 해석의 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많은 작가가 작가노트 쓰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작가노트의 용도가 다양한 데에서 오는 혼란, 비평문과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 스스로의 경험을 글로 드러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경우 등 다양합니다. 본 워크숍에서는 작가노트 쓰기의 기초를 잡고 스스로 글을 써본 뒤 간단한 합평과 퇴고를 거칠 예정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작업에 가까이 다가가는 글, 타인 또한 나의 작업에 가까이 닿을 수 있도록 이끄는 작가노트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각 회차마다 준비해 올 과제가 있습니다.)

일시 | 2024년 5월 9일, 16일 목요일, 오후 7-9시 (2회차)
강연자 | 김지연(미술비평가)
참여인원 | 8명
참여신청 | https://bitly.ws/3inVx


≪텍스트의 섬광 The Light of Text≫
24.04.05-24.05.11

문화살롱 5120 2023 전시공모 선정작가전

《텍스트의 섬광 The Light of Text》

24.04.05-24.05.11

참여작가 | 로트링겐 (일환, 김동건, 민예빈, 인지용, 한채연)
관람시간 | 화-토, 오전 10시-오후 7시(일요일, 월요일 휴관 / 공휴일 휴관)
※ 휠체어 접근이 가능합니다(미리 연락 부탁드립니다).
오프닝 | 2024년 4월 5일(목) 오후 5시
전시 사진 | 이동웅
포스터 디자인 | 박신욱
스틸컷 제공 | 로트링겐
문의 | 02-948-1217 / culturesalon5120@gmail.com

영화는 빛을 기입하고, 빛은 세계를 각인한다. 입자와 파동, 어느 한 가지 성질로도 규정될 수 없는 빛이라는 물질의 현존 하에서, 광학적 매체인 영화는 한 세기 이상의 시간에 걸쳐 세계를 조망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존재론을 변주해왔다. 빛에 의해 구성된 프레임이 또다시 빛을 경유하여 투사하는 이미지가 꿈과 환상의 이중 노출이든, 실재하는 무언가에 접근하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이든 말이다. 비록 감광물질로서 필름의 유효성이 이산적 신호로 대체되어 지표성의 상실과 장치에서의 변화를 맞이해야 했으나, 영화의 개념은 수많은 이름들과 이름들로 분열되거나 확장되어 형언할 수 없는 시공간에 (재)배치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사람들은 1895년 12월 28일의 파리 그랑 카페로, 뤼미에르 형제가 <시오타 역에서의 열차의 도착>을 상영한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점차 몸집을 키우며 가까워지는 열차의 모습을 본 관객들이 공포 속에서 상영관을 도망쳐 나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기억하며, 우리는 극장이 아닌 곳을 다시 한 번 극장으로 방문하고, 그곳에서 영화를 방문할 것이다. 빛의 현존이 우리의 시야를 지속한다면, 따라서 우리가 빛을 통해 세계를 호명할 수 있다면 영화는 언제까지나 영화일 것이고 영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까지나 극장의 연속일 것이다.

문화살롱 5120에서 4/5(금)부터 5/11(토)까지 진행되는 로트링겐의 전시 《텍스트의 섬광 The Light of Text》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건너온 다섯 갈래의 텍스트를 각각 영화로 옮겨낸 다섯 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빛의 물리학에 따라 상이하게 표현되는 텍스트의 표면을 포착한 스탠 브래키지의 영화 <The Text of Light>(1974)의 구조를 도치한 전시의 제목 《텍스트의 섬광 The Light of Text》은 질료이자 형상으로 영화를 공-구성하는 텍스트 그 자체에서 가장 근원적인 섬광, 영화의 존재 조건이 되는 빛을 찾는다. 첫 번째로, 일환과 김동건이 공동으로 연출한 다큐멘터리 <다다이슴/지상선을 위하여>(2024)는 조선 최초의, 그러나 최후의 다다이스트였던 고한용의 수필과 편지를 인용하여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기의 다다이즘이 추구했던 신화를 현행하는 시공간으로 전이한다. 3채널 비디오 전시로 기획된 그들의 또 다른 공동 연출작 <즐겁지 않은 지식>(2023)은 파주 출판 공장의 현장,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낭독하는 프랑스인 교수, 그리고 숲의 풍경의 공립으로 물질과 비물질이 교차하는 지식의 경화 과정을 정련한다. 인지용의 <Bye, Snark, Boo- Jum!>(2023)은 속삭임이 들리는 듯한 페이지 위에서 빛이 번지고 마찰하는 연속을 회집하면서 루이스 캐럴의 연작시 「스나크 사냥」을 펼쳐낸다. 욘 포세의 중편소설 연작 『3부작』의 텍스트를 차용한 민예빈의 <남겨진 사람들>(2024)은 물로 환원되는 질료의 변주들을 피오르 연안에서 마주하기를 원하는 연인들의 시간으로 채운다. 마지막으로,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를 낭독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그에 대한 딸의 답신으로 포개어진 한채연의 <Nighttide>(2024)는 망각할 수 없는 역사와 개인의 기억, 그 층위의 바탕에 이르러 지속된 비탄이 공명함에서 나아가 그 틈으로 매듭지어진 사랑을 드리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다섯 편의 영화는 텍스트의 능선을 따라 명멸하는 섬광을 어두운 극장 안으로 옮겨낸다. 세계는 빛의 현현을 증명하고, 영화는 빛의 시간을 증언한다. 빛은 언제나 시차를 두고 우리에게 뒤늦게 도래하겠지만, 영화는 지나간 기억과 도래할 기억을 모두 간직하고는 우리를 한 번의 마주침 안으로 불러낼 것이다.

글 : 민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