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zine-vol2-5

칼럼

‘장애’ 는 새로운 시각의, 또 다른 예술의 ‘독특한 오브제’ 다.

김형희


‘장애’는 단순한 용어가 아니고 하나의 문화이다.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하며 같은 것을 보고 있더라도 전혀 다른 관점과 의식으로 전혀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이것이 장애예술인이 갖는 특성이고 수월성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복지법에 ‘신체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상태’를 장애로 정의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장애유형을 3개의 대분류(신체 외부 장애, 신체 내부장애, 정신적 장애)와 15개의 소분류로 나누고 있다. 이는 좀 더 체계적이고 맞춤적 지원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장애인예술은 예술 자체보다 복지 차원의 장애라는 점이 부각되어 ‘장애인들이 예술을 잘할 수 있나? 장애인 치곤 잘했네’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예술정책 현장에서 장애와 예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생동감 있는 움직임은 기존 예술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장애’라는 주제가 품고 있는 소수자성과, ‘장애가 있어 못하는 것이 아닌, 장애가 있기에 가능한’ 도전의식, 창의성, 다양성 등이 동시대 예술의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흐름과 만나 ‘장애예술’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애’의 결핍이 ‘예술’과 만나 세상과 소통할 때
‘장애예술’이라는 새로운 시각의 또 다른 ‘예술언어’가 된다.

‘장애예술’은 문화 다양성과 포용적 예술에 기반하여 새로운 ‘예술언어’로 사회에 다양성과 평등의 실천, 실행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현장에서 장애예술인들이 성장하고 잠재력을 발산하고 국내 장애예술생태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개념이다.

현존하는 예술 영역에 새롭게 등장한 ‘장애예술’은 아직 사전적 정의나 철학적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지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장애예술’이라는 새로운 길을 통해 장애예술인이 온전한 예술인으로 자립하고, 자아실현으로 성장하여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이 바뀌면 장애는 없다’

2020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공간 조성 및 접근성 확대를 위해 장애예술인 창작거점 공연장 조성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2023년 10월 24일 국내·외 최초로 높은 수준의 접근성을 갖춘 ‘모두예술극장’이 개관하였다.

모두예술극장은 창작 및 향유 접근성을 갖춘 공간이자, 예술적 가능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지원하는 열린 공간이다. 운영시설로는 공연장(250석), 창작공간(연습실 2개소, 스튜디오 1개소), 관객 휴식공간, 분장실, 장애인 화장실 등이 있으며, 공연장, 연습실, 창작 스튜디오를 저렴한 비용으로 정기·수시 대관하여 장애예술인(단체)의 창작·발표·교류 활동을 지원한다.

또한 공연장 및 창작공간을 중심으로 장애예술 창작 활성화 거점공간 운영, 장애·비장애의 경계를 넘어선 장애 예술의 활성화 및 사회적 인식개선을 위한 포용적 문화공간 활용, 작품 및 프로그램 개발을 통한 모두예술극장의 정체성 확립, 국내·외 우수 장애예술작품 프로그래밍 및 창작지원 서비스 구축, 공연사업, 무대 기술 및 접근성 서비스 등 운영 체계 안정화, 장애‧비장애 예술가 협업공간 및 소통의 장(場) 구성, 관객 개발 프로그램 및 신규 관객층 개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공연 예매 접근성 지원으로는 네이버 톡톡/카카오톡 오픈채팅 1:1 문자 예매, 실시간 전화 중계를 통한 수어 예매, 음성통화 예매 등을 지원하며, 관객 선택형 배리어프리 회차 운영으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개방형/폐쇄형 자막 해설(문자통역), 시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해설 및 개방형/폐쇄형 음성해설, 음성 소개, 터치 투어, 발달장애인을 위한 릴렉스드 퍼포먼스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접근성 매니저 지원의 측면에서는 직통 연결을 통한 접근성 서비스 신청, 공연장 및 공연 접근성 안내 지원(문자, 정보 영상 제공), 장애유형별 인적 지원 서비스(이동, 소통 지원) 등을 제공한다.

최근 최중증 장애인이 모두예술극장을 방문하여 남긴 말 중에 ‘그동안 이런 서비스를 받아 본 적은 처음’이라며 ‘다른 공연장을 가려면 사전에 전화해서 접근성에 대해 물어보고 도착해서도 10가지 이상의 불편함을 겪고 도움을 요청해야 했는데, 모두예술극장에서는 10가지의 불편함이 2개로 줄었고, 그 2개의 불편함마저도 접근성 매니저들이 해결해 줬다’고 언급했다. 이렇듯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와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환경이 바뀌면 장애는 없다.

 

 

장애 유형별 물리적·정서적 접근성 현황

 

모두예술극장은 국내 유일의 장애예술인 표준 공연장으로, 모든 장애인이 어려움 없이 창작 활동과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장애 유형별로 다양한 접근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공통 편의
지하철 2, 5호선 충정로역 7번 출구가 공연장 지하 2층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건물 내부 승강기에서는 층별 점자 안내 및 음성 안내가 제공되며 낮은 높이의 버튼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픽업 서비스를 사전에 예약하면 접근성 매니저가 미리 도착 지점으로 나가 안내한다.

이동 약자의 활동 측면을 고려하여 건물 바닥의 높낮이 차를 없애고 전면 평면으로 조성하였으며, 엘리베이터로 모든 층을 이동할 수 있다. 편의 시설로는 이용객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릴렉스 라운지와 남녀 장애인 화장실 및 다목적 가족 화장실, 수유실이 있다. 공연장 무대의 상하수1) 자막 모니터, 분장실의 자동 출입문, 그리고 휠체어 충전기(거치식 충전기 4개/이동식 어댑터 10개) 또한 이용이 가능하다.

– 휠체어 장애인
지하철 이용 시 충정로역 8번 출구 맞은편 엘리베이터에서 공연장까지 무단차로 이동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와 가까운 하차문은 애오개 방면 3-1, 서대문 방면 6-1이다. 엘리베이터 1호기에 탑승하여 B1층 대합실로 올라온 뒤, 개찰구를 나와 8번 출구로 이동하여 엘리베이터 2호기를 이용하면 지상으로 나갈 수 있다.

장애인 콜택시 이용 시 모두예술극장 건물 초입에서 하차하면 턱이 없는 평면 도로가 건물까지 이어져 휠체어 이동이 용이하다. 자가용 이용 시 주차장 입구는 건물 뒤편에 있으며,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은 지하 2층에 6면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리면 모두예술극장에 도착한다.

건물의 입구는 수평 접근이 가능한 자동 출입문이며, 공연장 로비에서 외부로 향하는 대피로 또한 단차가 없다. 휠체어 이용자의 높이에 맞춘 낮은 매표소 및 안내 데스크는 물론이고, 공연장 조정실 또한 무단차로 설계되어 있다. 공연장 내에는 경사로를, 분장실 안에는 장애인 화장실을, 샤워실에는 샤워 의자를 설치하여 쾌적한 공연 관람 및 창작 환경을 조성하였다.

– 시각장애인
시각장애인의 경우, 건물 출입구의 촉지도식 안내판 및 음성 안내를 통해 건물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공연장 내에는 점자블록 및 안전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으며, 안내견 동반 휴식공간과 폐쇄형 음성해설 수신기(50대) 또한 준비되어 있다.

– 청각장애인
매표소에 히어링 루프 시스템을 설치하고 수어통역사와 함께 응대 카드 및 패드를 비치하여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또한 문자 안내 방송 시스템(연습실 3대/분장실 4대)과 조명을 활용한 시각경보 시스템을 구축하여 모두가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

 

1) 상수와 하수는 무대 용어이다.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볼 때 오른쪽을 상수, 왼쪽을 하수라고 부른다.

김형희

최고의 무용수를 꿈꾸던 대학시절, 교통사고로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고,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 화가로 활동, 임상미술치료사, 기획자, 강연자 등 꿈과 희망, 도전을 전하는 멀티아티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webzine-vol2-4

칼럼

표준형 어린이

김지완


  고층 아파트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승강기 내부 버튼의 위치와 배열을 본다. 요즘은 세로형 버튼과 가로로 된 장애인용 버튼이 함께 놓인 곳이 많지만, 과거에 지어진 아파트는 그렇지 않았다. 세로형 버튼만 한쪽 편에 놓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것의 위치를 여덟 살 때 처음 인식했는데, 그 무렵 가족이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13층 꼭대기 층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래 평균 키를 한참 밑도는 작은 체구의 여자애였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내 키로는 두 번째 줄 맨 꼭대기에 있는 13층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창피해서 한동안 그 사실을 숨겼다.
  4층을 누르는 아저씨가 있고 12층을 누르는 아줌마가 있으면 12층에서 내려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갔다. 6층을 누르는 언니가 있고 11층을 누르는 할머니가 있으면 11층에서 내려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갔다. 3층을 누르는 아저씨와 단둘이 타게 되면 그냥 내 손이 닿는 제일 높은 층을 눌렀다. 집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이런 방식을 썼다.
  “너 꼭대기 층 사는 애 아니야? 왜 10층에서 내려?”
  어느 날 10층에 사는 언니가 습격처럼 질문을 날렸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언니는 당황했다.
  “세상에…. 그럼 오늘은 내가 눌러줄게.”
  “근데 저 그냥 9층에서 내려서 뛰어 올라가면 되는데요? 13층까지 1분 만에 갈 수 있는데요? 별로 안 힘든데. 진짠데요.”
  나는 과장되게 거절했다. 어린이의 영문 모를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건지는 몰라도 언니는 13층 버튼을 눌러주지 않았고, 나는 별일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한 채 문이 열리자마자 비상구로 뛰어가 축지법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한테 이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쪽팔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승강기로 데려갔고 버튼 앞에서 까치발을 드는 내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껄껄껄 껄껄껄 막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물론 그냥 웃기만 하지는 않았고 집에서 망치와 판자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었다. 조그만 상자같이 생긴 발판이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승강기에다 발판을 의기양양하게 내려놓았다.
  “올라가 봐라.”
  할아버지가 만든 발판과 승강기의 모서리가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다. 나는 그게 굉장하다고 느꼈고,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지금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할아버지, 나는 1층에서 누를 때 13층 버튼이 안 닿는 건데…?”
  “올라가면 이제 닿는다. 올라가 봐라.”
  “여기는 13층 엘리베이턴데…? 나는 이거를 1층에 놓고 싶은 건데…?”
  여덟 살의 나는 층마다 승강기가 각 한 대씩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논리적으로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아무튼 그때의 내 머릿속에서는 승강기가 층층이 있는 집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발판은 ‘13층에 있는 승강기’가 아니라 ‘1층에 있는 승강기’에 놓여야 하는 거였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부터는 발판에 올라가 13층 버튼을 수월하게 누를 수 있었다.
  “엄마야, 키가 너무 작아서 안 닿는가베? 니 얼른 커야 되겠다.”
  그러나 발판에 올라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한두 마디씩 얹는 어른들은 잊을 만하면 나타났고 나는 그때마다 번번이 마음을 다쳤다. 학교에서 크고 작게 속상한 일이 있었던 날에는 그냥 예전처럼 아무 층에서나 내려 비상구 계단을 이용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발판을 마치 절교한 친구를 바라보듯 낯선 표정으로 바라보는 날들이 있었다. 나는 이 일련의 일들이 다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탓이라고 생각했다. 표준, 평균, 정상, 일반과 같은 단어들이 단어와 그 뜻을 채 알기도 전에 관념으로 내 안에 먼저 자리 잡았다. 내가 그것들에 못 미치는 어린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무렵 또 하나의 딜레마가 있었다. 발판을 외면하고 발판을 쪽팔려 하는 일이 그것을 만들어준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할아버지를 쪽팔려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다리에 마비가 온 뇌 병변 장애 2급이었다. 꾸준히 재활운동을 한 덕에 그는 비장애인보다 가구나 기계를 훨씬 잘 조립했고, 택시운전사 경력으로 운전도 무척 잘했으며, 지금도 집안 곳곳을 보수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탁월한 장인과도 같다. 나는 가끔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교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나를, 정확히는 나와 내 할아버지를 발견할까 봐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고 조수석에 눕다시피 했다. 할아버지가 한 번은 왜 그런 자세로 있느냐고 물었다. 이게 편해서. 성의도 없고 자신도 없는 내 대답에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알아차렸을까 그때도 두려웠고, 사실은 지금도 두렵다.
  나도 할아버지도 표준이 아니라는 생각…. 발판이 쪽팔린 것과 할아버지가 쪽팔린 것과 내가 나라서 쪽팔린 것이 도무지 구분되지 않았다. 나쁘고 어리고 구린 나를 지금까지 기억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달리 어떡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승강기에는 가로형 버튼이 없는데, 학교에서는 “야 이 장애인아!”를 욕으로 쓰는 아이들이 존재하는데, 그 날것의 세상에서 어린이는 나와 발판과 할아버지의 장애를 몽땅 미워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작은 키를 쪽팔려 하는 어린이는 할아버지의 장애를 쪽팔려 하는 어린이가 된다. 자신의 작은 키를 쪽팔려 하는 어린이는 다른 친구의 쪽팔린 점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표준과 평균과 정상과 일반같이 하얀 단어로 약자의 삶을 침투하고 독처럼 퍼져나간다. 몸에 대한 모욕이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다양한 층위의 약자를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른이, 교육이 어린이에게 말해줘야 한다. 쪽팔린 몸이라는 건 이 세상에 없단다. 정말이지 그런 건 없단다.
  좋은 어른이란 발판에 올라 버튼을 누르는 어린이를 함부로 귀여워하는 대신 장애인용 버튼이라는 시스템을, 그 시스템의 부재를 생각해낼 줄 아는 어른이라고 믿는다. 약자를 위한 시스템의 가장 멋진 점은 그것이 다양한 층위의 약자를 순환한다는 것이다. 가로로 된 장애인용 버튼을 키 작은 어린이와 장애인이 함께 쓰듯이.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승강기를 장애인과 노인과 임산부가 함께 쓰듯이. 어느 날 발목을 접질린 비장애인이 장애인용 승강기를 타면서, 새삼스레 승강기의 존재를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리듯이.
  나는 할아버지의 새하얀 기아 크래도스 초기형 자동차를 타고 등교하던 어린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오늘은 계단을 뛰어오르지 말고 발판 위에 올라가 승강기 버튼을 눌러보라고. 발판을 만들어준 할아버지한테는 감사하되 버튼 위치를 이렇게 만든 승강기 업체를 향해 속으로 침을 뱉어버리라고. 표준형 어린이 같은 건 그때도 지금도 없다고.

김지완

동인 <문어뱅스> 소속입니다.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씁니다. 2023년 마해송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24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어린이에게 잘 보이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 저도 좀 끼워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제가 먼저 재미있는 글을 들고 기웃기웃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webzine-vol2-3

살과 껍질

계미현


  미현의 등에서 무언가 얇은 것이 벗겨지고 있다. 그것이 날개인지 아니면 미현이 이 년 만의 휴가지로 인도네시아의 섬 발리를 택하고 매일 서핑을 한 결과인지는 모른다. 이럴 때 등에 천천히 오일을 펴 발라 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을 천장 쪽으로 뒤집어 누우며 미현은 중얼거린다.

  쓰라린가? 단 하나의 질문이 들려온다. 그것이 창밖 골목의 원숭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미현이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 질문의 형태로 발화된 것인지는

  창문을 열자 모든 원숭이가 털 고르기를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돌려 미현을 본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얼굴도 있다. 당장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도 있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 미현은 그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실은 모든 원숭이가 웃고 있었다면)

  미현은 남편이 있는 여자의 볼에 뽀뽀를 한 이력이 있다. 여자는 서핑을 하다 말고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으며 그로부터 두 시간 전 환각 버섯을 1g 먹은 상태였다. 뽀뽀 직후 여자는 코코넛의 살을 떼어먹으며 말했다. 파도 맛있다.

  실은 등에 오일을 펴 발라 줄 아내를 찾고 있음을 여자가 알게 된다면 미현은 이틀 안에 발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실은 등에 오일을 펴 발라 줄 아내를 찾고 있음을 원숭이가 알게 된다면)

  (실은 쓰라리다면)

  직전의 결심을 거두기 위해 창문을 닫고 다시 침대로 향하던 미현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 얇은 것을 밟고 미끄러진다.

  그것은 희고 불투명한 코코넛의 살이다.

계미현

웹 시집 <현 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yuns)>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http://thefallofthehyuns.net) 창작집단 개미와 꿀벌의 일원이다.


webzine-vol2-2

오렌지 되기

강혜빈


귤 종류의 하나인 오렌지는
3.2 킬로그램의 튼튼한 한국인으로 태어났다
둥글고 견고함 무겁고 부드러움을 겸비한 오렌지는
21세기에 태어나고 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태어나자마자 세계의 착잡함을 알아버린
오렌지의 꿈은 다름 아닌 자연사自然死였다
오렌지는 오렌지를 낳은 오렌지들의 첫아이였으며
오렌지 아래로 동생 셋이 있었으나
둘이 병들어 죽고 하나는 살아서 우애가 좋았다
오렌지는 울퉁불퉁한 껍질과
축축한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중성이었으나
때로는 활짝, 나비의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푹 익은 마멀레이드가 되어보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살뜰한 연인이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이
택배 기사 혹은 파일럿이
사소한 낑깡이 되기도 했다
괄호 열고
오렌지 낯설게 발음하기
괄호 닫고
물 한 모금
두리번거리다 배를 긁다
의식적으로 침 삼키기
의식적으로 눈 깜빡이기
의식적으로 혓바닥의 위치 느끼기
의식적으로 인간처럼
괄호 열고
오렌지 마침표
오렌지 쉼표
오렌지 느낌표
오렌지 물음표
괄호 닫고
침묵, 침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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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 아니오

심장의 근육은 불수의근
마음은 심장 속에 있지 않고
현관 앞에 내다 버린 택배 상자 속에 있다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 뚜껑 속에 있다
비행기 화물칸에
아내의 사랑스러운 이마 위에
오렌지의 몸으로 산다는 건 말이지
오렌지만 알 수 있어
기분이 오렌지할 때는
지도를 펼쳐 놓고 모르는 가게에 점을 찍는다.
이방인의 마음은
이방인만 알 수 있어
혼자 사는 사람의 마음은
혼자 사는 사람만 알 수 있어
딱 오늘 하루만큼의
딱 한 사람 여분의 정직한 외로움
오렌지 주스가 되어서
오렌지 잼이 되어서
오렌지 껍질 설탕 절임
오렌지 케이크 소르베를 채운
오렌지 지브레
오렌지 크림 케이크 글레이즈드
오렌지 세그먼트가 되어서
나의 쓸모를 고민하다
진지해지기 전에
아무렇게나 오렌지.
단지 소심하고
단지 사려 깊은
이상한 오렌지 되기.

강혜빈

뉴노멀이 될 양손잡이. 낮에는 청소년들과 국어 수업을, 밤에는 타로와 복싱을 한다.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 『미래는 허밍을 한다』, 『밤의 팔레트』,『어느 날 갑자기 다정하게』 외 다수. 사진작가 ‘파란피 PARANPEE’로 활동 중이며, 빛과 컬러를 중심으로 이미지를 발명하고 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불문학을 배웠다. 서울문화재단 2021 ‘창작집 발간 지원사업’ 기금을 수혜했으며, 첫 책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KO 2020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었다.


webzine-vol2-1

여는 글

웹진 놀 편집부


나와 당신, 우리의 몸

  문화살롱 5120이 두 번째 웹진 ‘#몸’을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 문화예술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문화예술은 우리의 몸을 떼어 놓고서 이야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개개인에 특유한 것이자 모두가 다른 것이기에 다양성 속에서 이야기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서 웹진 ‘놀’ 편집부는 우리 사회에서 몸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을 이번 호에 담고자 총 8인의 필진을 선정, 섭외하여 이번 기획호의 원고를 부탁드렸습니다.

 ‘다른 몸들’의 대표 조한진희의 ‘몸과 질병 서사’는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 전제하는 건강한 몸이라는 기본값 속에서 타자화되는 몸을 돌아봅니다. 필자는 바쁜 현대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이 만성질환자의 시대라 할만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에 건강중심사회가 소외시키는 우리의 몸을 복권하고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바꾸자고, 아파도 괜찮은 사회를 함께 만들자고 요청합니다. 무용평론가 허명진은 감각이 ‘몸의 순간을 획득하는 역설적 차원’에서 우리가 당연하게만 생각하는 물리적 신체기관과 감각과의 연결을 해체할 필요에 대하여 논합니다. 그에게 우리의 몸은 “레몬의 신맛을 떠올리지 마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그 신맛을 느끼는, ‘이미 있음’의 차원을 담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몸의 특성은 “기술적 진보라는 관념을 무색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러한 필자의 시선을 통해 코로나 19 이후 가열차게 논의되었던 메타버스 세계의 몸이 처음 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의식이 언제나 가상의 메커니즘을 활용해 왔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미술평론가이자 인권활동가인 남웅은 당연하게 여겨 온 신체적 특징에 근거한 성별의 구분이 오늘날 어떠한 담론 속에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원론적 성별의 고정관념 속에서 배제되는 자들의 몸에 관하여 “기존의 규범을 강고히 하며 몸의 양태와 행위에 위계를 두고 범죄화하기에 앞서, 그가 자신을 설명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상해와 손상, 차별과 낙인 등의 위해를 겪지 않도록 사회·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광화문에서 이원론적 성별의 이분법에 대항하고 젠더의 분화된 스펙트럼을 공론화하고자 했던 이들에 가해지는 폭력에 가슴 한쪽이 시큰했습니다. 그들을 지지하고 연대할 단어를 선사받은 것에 고마운 마음입니다. 동화 작가인 김지완은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어린이의 몸에 주목합니다. 하등 불필요하며 독과 같은 사회적 우열을 만들어 내는 ‘표준’이라는 개념을 문제 삼으면서 말이죠. 작가가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픈 한 마디 “표준형 어린이 같은 건 그때도 지금도 없다”는 말은 어릴 적 어느 순간의 저에게도 여러 번 필요했을 말입니다. 이번 웹진에는 장애예술인 창작거점 공연장으로 2020년 건립된 ‘모두예술극장’의 이야기 또한 실었습니다. ‘장애’는 단순한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라는 천명에서, 또한 이것이 장애예술인이 갖는 특성이자 수월성이라고 말하는 데서 우리는 ‘정상’과 ‘장애’라는 범주를 돌아보게 됩니다. 장애여성공감의 진성선 활동가는 배우이자 활동 지원 현장의 코디네이터로서 다양한 주체와 협력하는 몸을 돌아봅니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몸들의 경험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에 몸에 대한 인식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서로 맞대어 서는 몸들에 아낌없는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보냅니다. 몸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이라는 렌즈 속에서는 어떻게 변주될까요? 이러한 궁금증과 기대 속에서 몸에 대한 창작 시 두 편 또한 의뢰하여 함께 실었습니다. 몸을 이야기하는 언어는 다시 그렇게 우리의 몸을 환기합니다.

 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꾸려진 글뭉치들 외에도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웹진 ‘놀’ 편집부는 이렇게 문화예술 담론 속의 몸 이야기에 하나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실타래들이 여러분의 사유 속에서 이어져 또 다른 이야기들로 곳곳에 펼쳐나가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2024년 여름, 전에 없는 습도 속에서 ‘놀’ 두 번째 호를 마무리하며
문화살롱 5120 디렉터 배혜정

 고요한 밤에는 바깥의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리곤 합니다. 이웃집 전화벨 소리, 한낮에 미처 떠오르지 않았던 말들, 운이 좋다면 풀벌레 소리도 들을 수 있지요. 지하철역과 멀지 않은 집에서는 이따금 방바닥에 귀를 대면 열차가 역을 통과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저는 그것이 도시의 맥박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만약 도시 전체가 거대한 몸이라면, 거기에 호흡을 부여하는 것은 도시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존재일 것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식물까지도 모두 말이죠.

 그러나 도시의 구획과 벽들은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 가로놓여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여전히 타자의 영역에 갇힌 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강요받으며, ‘다름’은 이 완벽해 보이는 도시에 균열을 초래하는 불온한 것으로 규정되곤 합니다.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은 언제나 균열로부터 비롯되는데도 말이죠. 어쩌면 우리의 도시 또한 균열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몸에 관한 여덟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성스레 원고를 준비해 주신 필진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부디 한밤의 적막 속에서 나누는 말들처럼 조곤조곤 전해지기를, 그리하여 벽 너머의 서로를 궁금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 매니저 박신욱

 이번 ‘vol.2 #몸‘은 여러 필진의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몸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담았습니다. 이번 호를 준비하면서, 각기 다른 몸을 지닌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 아래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곧 기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서로 다른 얇고 투명한 글들은 한데 모여 하나의 말뭉치가 되었고, 그 자체로 충분했습니다.

 여러분께선 이 말뭉치 속에서 눈여겨보지 않던 누군가의 동선을 따라가고, 피부 아래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며 건강을 되새기고, 내려다보던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규정된 몸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여정으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작게나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몸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프로그램 매니저 홍해준

 세상에 좋은 글들이 너무 많은데,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더 골똘히 찾고 집요히 뒤지지 않으면 우리가 만날 확률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실은 제가 찾거나 뒤졌던 게 아닐 것입니다. 작가님들이 작가님들의 자리에서 언제나 해야 할 말을 해왔기 때문에 마침내 만나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웹진에 기꺼이 참여해 주시고 마음을 모아주신 모든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웹진을 기획하면서 많은 원고와, 원고 속 문장과, 문장을 쓴 사람과, 사람이 속한 단체와, 단체가 하는 활동과, 활동이 가진 의미와, 의미가 파생하는 물결을 보았습니다. 그 물결이 제 안으로 어떻게 스며들고 흡수되는지도 지켜보았습니다. 그건 하나의 큰 몸처럼 느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번 기획 호를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꼭 그 과정을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문화살롱 5120과 웹진 <놀>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꾸준히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코디네이터 김지현


지망생의 노래

기획 칼럼

지망생의 노래

윤혜은


   삼십 대 중반, 더는 지망생이 되는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십 대의 나는 가수 지망생이었고, 이십 대에는 소설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는 그랬을 것이다. 야간자율학습을 면제받은 채 노래를 부르러 다녔고,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한 뒤로 계속 소설을 쓰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스스로를 지망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지망생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어떤 전문적인 분야의 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 또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들고자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시절마다 사로잡힌 예술에 대한 탐구력이 강하지도, 앨범을 내거나 등단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알량한 재주를 부리고 이따금 누군가 감탄하는 걸 즐기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꿈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이 꿈을 꾸는 게 맞나? 자주 멈칫하게 되는. 그러니까, 지망생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 ‘넌 ~가 될 거잖아’라고 확인하듯 응원이라도 건넬라치면 그저 아리송하게 웃곤 했다. 그건 내 애매한 재능과 진심을 들키지 않기 위한, 남들이 기대하는 내 미래에 미치지 못했을 때를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였지만, 한편으론 진심으로 궁금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면 꼭 가수가 되어야 하나? 소설 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소설가가 되어야 하나? 뭔가를 하고 있다고 선언하면 그걸로 무엇이든 되어야 하는, 이뤄야 하는 루트를 결국 이탈해버리고 말거란 상상으로 괴로웠다. 실제로도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할 줄 몰라 아예 그 마음을 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말았으니, 일찍이 나를 잘 알아봤다고 해야 할까. 외부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도 아무런 다짐이나 각오를 요구받지 않아도 되는 성실한 감상자로서의 자신이 더 잘 어울린다고 서둘러 타협하면서 나는 기나긴 지망생 흉내의 시간을 끝냈다.
   이렇게 보니 오랫동안 재능을 ‘어떤 지점에 신속히 도달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단단히 오해했던 것 같다. 재능은 레이스를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데. 나도 좋아하는 마음의 부침을 견디면서 그럼에도 이 짓(!)을 계속 하고 싶은 상태, 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느껴볼 수 있었더라면. 짧지 않은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그러니까 어린 날 내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또래와 구분되는 선명한 재능이 아니라 헤맬 수밖에 없는 삶의 속성을 받아들이는 지구력이었음을, 이제는 안다는 뜻이다. 안다고 위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지망생’을 관둔 서른에게 필요한 건 때늦은 위로가 아니라 회복이었다. 다행히 삶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수정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며 삼십 대를 보내고 있다. 운이 좋게도 매주 꼬박 한 시간씩 내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팟캐스트를 진행 중이고, 소설보다 늦게 쓰기 시작한 산문으로 묶인 책이 하나둘씩 쌓이고 있다. 노래와 소설을 통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전하는 요즘이 문득문득 신기하다. 상상한 적 없는 삶을 노력하며 이어가고 있다는 게 꼭 내게도 잠재력이랄까 가능성이 있었다는 증거 같아서 몰래 벅차오르기도 한다. 타인의 번뜩이는 재능 앞에선 여전히 초라함을 느끼지만 내가 지닌 장점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덕분에 까닭 모를 불안에 휩싸여도 섣불리 끝을 점치려 하는 충동이 줄었다. (물론 지금은 또 다른 서투름으로 뚝딱거린다….) 좋아하는 일을 어려워하며 해내는 괴로움으로 뿌듯할 때마다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는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에 감히 공감하는 날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시 ‘지망생’이 될 수 있었다. 1년 전 덜컥 작사 클래스를 등록한 뒤 첫 수업을 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곁에 두지 않겠다고 입을 다문 시절이 떠올랐다. 맞아 그랬지. 그런데 걸어 잠근 마음에 금이 가는 것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언젠가의 나처럼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대신 이 마음에 정확히 대답하고 싶어서 10개월의 커리큘럼을 포기 않고 따라가 봤다.
   노래를 잘 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는 계속 불러보며 쓰는 것이다. 이때의 가창이란 내 가사가 데모곡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지, 멜로디와 가수의 입에 잘 맞을지 점검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만, 쓰고자 하는 가사를 다름 아닌 내가 가장 먼저 불러본다는 점이 나로서는 어떤 위로가 되었다. 알고 보니 노래를 쓰는 일과 노래를 부르는 일이 가깝다는 사실이, 그걸 직접 알아채 버린 오늘이 놀랍고 반가웠다. 완전히 종결되어 상실로 남은 시절도 새롭게 이어질 수 있음을, 작사를 배우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마침내 나에게 돌려줄 말 한 마디도 얻었다.
   ‘이제는 뭔가를 원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있어서도, 너무 간절히 원해서도 아니고 한번 되어보고 싶은 그 마음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라고.
   혼자 되뇌었을 뿐인데 속이 다 시원하다. 기대하는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지켜볼 수 있는 거였구나. 어처구니없는 홀가분함이 밀려온다. 그러므로 가요대회에 나갔던 10대처럼, 문학상에 응모했던 20대처럼, 30대의 나도 여전히 지망생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애쓰는 나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 깨끗한 기대에 따라오는 응원을 느낀다. 내가 줄곧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클래스의 정규 수강은 끝났어도 학원에서 제공하는 데모곡을 받으며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유독 내 취향의 노래를 받는 날이면 언어의 진짜 자리는 멜로디 위가 아닐까? 하고 호들갑을 떨지만, 새벽 내내 빈 문서를 마주한 채 한 곡을 반복재생하고 있다 보면 슬쩍 겁이 난다. 작사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져서 언젠가 지금의 즐거움을 잃어버릴까 봐.
   어쩌면 이런 게 진정한 지망생의 마음이겠지. 지금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뒷걸음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살면서 한 번은 더 지망생이 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써의 지망생이라면 거의 처음 겪는 거나 다름없겠지. ‘어떤 전문적인 분야의 일을 배우는’ 사람이자 이왕이면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들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되고 싶어!’라는 말을 질러 놓고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윤혜은

책방지기, 작가, 그리고 작사가 지망생. 오래하는 일을 결국 가장 좋아하게 된다.
에세이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 『아무튼, 아이돌』, 팟캐스트 ‘일기떨기’에서 출발한 대화집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는 그렇게 탄생했다.
동료 작가와 함께 망원동에서 ‘작업책방 씀’을 운영하고 있다. 이다음에는 어떤 작업의 결과가 먼저 올지 즐겁게 기다리는 중이다.


비평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나는 왜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가?

기획 칼럼

비평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나는 왜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가?

이연숙(리타)


   웹진 <놀>의 청탁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런 주제라면 재미있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소 네가 뭔데? 싶은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은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제에 대해 생각할수록, 스스로도 내가 도대체 왜 비평을 통해서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그러게…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적당한 구실을 찾을 수 없지만, 내가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 싶어한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 단순히 말해 그들이 생산해내는 특수한 종류의 (주로 시각적인) 미적 대상과 감각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좋고, 또한 그런 대상과 감각이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내 나름의 관점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이를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일시적이나마 모종의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좋다. ‘좋다’ 말고 좀 더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그런 단어를 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것이 스스로에게 최대한 정직할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비평 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특정한 계기도 시점도 기억나지 않고,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결국 우연히 그렇게 됐다는 말만 변명처럼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와 미술 대학을 거치면서 형성된 특수한(그러나 다분히 제도적으로 중층결정된) 주관이 나를 비평가라는 이름에 이끌리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 이름에 딸려 오는 상징 자본을 아마도 나는 갖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지금도 시원하게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항상 누군가에게 내세울 수 있는 그럴싸한 이름을 원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내가 이론이 되기에는 너무 ‘문학’적인 종류의 글쓰기들에 내내 매혹당해 왔다는 점 역시 비평 쓰기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요컨대 발터 벤야민의 글이 그렇다. ‘문필가’ 벤야민의 널리 알려진 에세이들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문자 역사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상투적인 대상들을 지극히 비밀스러운 암호라도 되는 양 재독해한다. 그의 <일방통행로> 속 “아크등”이라는 표제에 딸린 단 하나의 문장,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를 보라. 이것은 철학적 난제인가? 그보다는 오랜 짝사랑 중이던 그의 일기장 속 한 문장에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벤야민은 자신의 기억을 일상적인 장소들, 사물들, 단어들의 이미지와 결합하며 그것들이 우리의 세계 가운데서 평범한 배경이 아니라 독특한 전경으로 다시금 솟아 오르도록 만든다.

   이런 그의 일견 사색적인 태도는 시원스럽게 칼로 세상의 분할선을 뚝뚝 재단하고 어떤 건 ‘옳고’ 어떤 건 ‘안 된다’고 말하는 비평적 글쓰기의 논객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나는 그런 촌철살인의 글쓰기도 좋아한다. 요컨대 <예술의 비인간화>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새로운 예술의 출현에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날리는 냉소적인 ‘일침’을 보라. “이러한 [새로운 예술을 하는] 젊은이들과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그들을 사살해 버리든지 아니면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아니면, <장식과 범죄>에서 아돌프 로스의 장식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의 표현은 어떤가? “현대의 인간이 자기 몸에 문신을 한다면 그는 범죄자이거나 인격파탄자다. (…) 문신한 자가 자유로이 죽었다면, 그것은 그가 살인을 저지르기 바로 몇 년 전에 죽은 것이다.”(문신이 많은 사람으로서 나는 이 대목을 기껍게 웃으면서 읽었다.) <시각과 언어2>에서 최민이 인용하는 M. 포레브스키의 비평가에 대한 정의도 재밌다. “[비평가는]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고 미술가가 되지 못했고 차선책으로 비평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비평가란 다른 무엇보다도 게임을 하는 선수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는 유일한 목표는 그 게임이 연장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내기를 거는 사람이다.” 그의 정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이런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당연히 나 역시 그가 하는 게임에 참여하고 싶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까지 쓰고 깨달은 점이 있는데 지금까지 인용한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낄 수 없는 게임에 참여하려는 ‘발칙한’ 욕망을 품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비평을 쓰고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된(아니, 연결된 것 같다고 혼자 믿고 있는) 까닭은 이런 우연한 계기들의 누적을 통해서다. 비평 또는 에세이라 분류되곤 하는 ‘애매모호한’ 종류의 글쓰기와 그런 글쓰기를 하는 이들에게 매혹되고,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다 보니 비슷한 유형의 글쓰기를 하게 되고, 그렇게 계속 쓰다보니 점점 더 쓰기를 통해서만 (세상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쓰는 사람들이라면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부디 그래주기를 바라지만) 내 경우에는 원래도 좀 둥글지 못하고 모나고 예민하던 성격이 쓰기를 지속하면서 더더욱 비사회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 이제 쓴다는 것은 선택의 차원에 귀속된 문제도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글의 제목에서 제기되는 질문을 바꿔보면 어떨까? “나는 왜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고자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왜 비평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될 수가 없는가?”로. 이제 대답은 한결 명쾌해진다.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가 아니면 동료 예술가들은 물론이고 세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비평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사회적 능력의 결여를 뜻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물론 나는 비평을 통해 동료 예술가들과 연결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좋다’에 앞서, 그것 외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불능의 감각이 내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 어떻게 비평 쓰기를 통해 이 같은 불능의 감각을 공동의 것으로 작동시킬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이것은 내가 책임감을 느끼는 몇 안 되는 ‘문제’들 중 하나다).

  갑작스럽지만 여기서 떠오른 타가메 겐고로의 만화 중 한 장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게이, 강간, 폭력적인 성교, 성적 비행, 강압, 마약, BDSM, 에로틱 만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일본의 만화가”인 타가메 겐고로의 작품 중에서 『PRIDE』라는 장편 만화가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불법 야망가 사이트에서 처음 접했는데, 사디스트이자 돔 성향의 교수에게 반한 마조히스트이자 섭 성향의 대학생이 극한까지 그에게 조교당한 끝에 (실존적/육체적/사회적으로) ‘해방’되는 과정이 스토리의 주된 골자를 이루고 있다. 스토리가 고조되는 어느 한 시점에서, 대학생은 고문에 가까운 플레이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저는… 미칠 것 같아요!” 격려와 저항이 오가는 실랑이 끝에, 교수는 그런 대학생을 향해 (이제는 트위터 등에서 밈화됨으로써 작은 명성을 얻기도 한 대사인) 사자후를 토해낸다. “뇌에서 육체를 해방시켜!!”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대학생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 몸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생의 몸은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으로서는 절대 도달해서는 안되는 어떤 ‘선’을 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고통을 위험이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지가 작동하기도 전에 그것을 쾌락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고통이 한편 (역설적으로 인간 종의 생존에 필수적이기까지 한) 쾌락일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 지면에서 더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어쨌든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생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학교에 다니고, 시험을 치고, 친구를 사귀는 등의 사회적인 삶에 수반되는 ‘평범한’ 일상적 행위와 관습과는 아무 상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뇌에서 육체를 해방”시킴으로써 비인격적이고 비개성적인 육노예 중 하나로 전락 또는 ‘돈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생명력을 소진할 때까지) 쾌락을 생산하는 기계일 뿐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기로 동의한 그런 형태로서 생활을 꾸릴 수는 없는 존재다. 이처럼 때때로 하드코어 야망가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어떠한 계기로 ‘선’을 넘어 비가역적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다리는 불태워졌고, 되돌아 갈 수는 없다…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쓰는 일 외에는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불능감에는 의외의 해방감이 뒤따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이연숙(리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2015 크리틱엠 만화평론 우수상,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규칙의 인식과 변형 – 한국 동시대 미술 의 ‘규칙’에 대한 문제제기 허경

기획 칼럼

규칙의 인식과 변형 – 한국 동시대 미술의 ‘규칙’에 대한 문제제기

허경


현대프랑스철학과 미술
   불문과를 나오고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미셸 푸코와 현대성>이라는 주제로 학위를 받은 나는 2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른바 현대프랑스철학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수업을 해오면서 이러한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 중 상당수가 미술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물론 이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로부터, 고야와 고흐에 대한 언급, 마그리트를 다룬 책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단행본으로 출간된 강연 『마네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 관련 책들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조만간 이런 저술을 함께 해설하는 『푸코와 미술』이라는 책을 출간하려 한다). 이들은 회화와 조소로부터 설치와 영상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시각 예술가, 작가로부터 학부생, 대학원생, 강사, 교수, 그리고 비평가 등이다.

   더욱이 나는 최근 4~5년 전부터는 우연한 기회로 인연이 닿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아트플러그 연수, 인천아트플랫폼, 팔복예술공장 등의 여러 레지던시에서 <작가노트,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주제로 작가를 위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원래 나의 직업은 이른바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불문과를 나온 것처럼 시와 소설 등 ‘문학’을 좋아했고, 더구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여 팝ㆍ록부터 클래식, 현대음악, 국악과 월드뮤직에 이르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섭렵하며, 한때 후배 음악비평가들과 함께 음악 잡지를 창간하(여 망해보)기도 한 ‘덕후’인데, 이제는 미술에까지 나의 관심 영역이 확대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개인적으로도 줌 온라인 수업을 통해 같은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나로서는 정말 훌륭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 것이라, 여러모로 과분한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있다.

규칙의 인식과 그 변형
   이렇게 몇 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작가들의 글을 읽고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도록에 실릴 작가론 또는 전시 서문을 작성하다 보니, 나는 이 동시대 작가들이 보여주는 고유한 특징 몇몇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내 생각에, 그 공통점은 이들 작가 중 상당수가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규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나의 직업이 철학자이고, 특히 ‘사물의 질서’를 다루는 푸코의 『말과 사물』에 크게 영향받은 사람이라 이런 점에 나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규칙의 문제를 작업 노트에서 특별히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 중 나의 수업을 들었거나 내가 직접 작가론을 써준 작가들은 문채원, 박경종, 박지혜, 정기훈 등이다(사실 모든 ‘참다운’ 예술가들이란 지난 시대의 규칙을 변경시킨 이들이므로 모든 예술가는 크든 작든 규칙의 존재를 의식하며 이에 대해 작업하고 있을 것이고, 사실 짧지만은 않은 기간 동안 작가들의 작업을 보고 글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규칙의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관심이 없는 작가는 한 명도 보지 못했지만). 이 작가들은 ‘규칙의 존재와 그의 변형’을 작업에서 의식적 형태로 추구하며, 이를 작업의 중심적 주제 또는 그러한 주제 중 하나로 설정하는 작가들이다. 아래에서는 이들 중 자신의 ‘작업 노트’ 혹은 (작가의 의견이 강력히 반영된) ‘소개의 글’에서 ‘규칙’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몇몇 사례만을 들어보려 한다.

문채원 – 각자의 매뉴얼
   ‘매뉴얼 등의 규칙을 재해석하는 데 집중해온’ 문채원은 2020년의 리:플랫 전시 <너무나 선량한 말들>에서 ‘사용자를 정해진 방향으로 이끄는 신호에 주목하며 비상 탈출을 위한 안내서부터 공익을 위해 만들어진 규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칙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 작가로서 소개된다. 문채원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많은 규칙을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끔 유도하여 우리의 기존 사고방식에 균열을 야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문채원은 ‘지침이 그 기능을 잃고 적극적으로 오역되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따라가기만 하면 목표를 성취할 것이라 여겨지는 매뉴얼의 작동 방식에는 보이지 않는 허점과 오류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사용 지침에 의문을 제기하고’ 또 ‘규제가 지닌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일은 ‘삶의 방식을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기에, 완전한 형태의 매뉴얼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는 인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결국, 이는 각자가 ‘변화하는 삶에 대응하는 자신만의 유연한 지침을 세우는 데에 이번 전시가 ‘선량한’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박경종 – 엄격한 경직성에 반하는, 즐거운 삐딱함
   박경종처럼 진지함과 심각함이 서로 분리 가능한 별개의 가치들임을 잘 보여주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박경종은 진지하나 결코 심각하지 않다. 박경종 작업의 특징이자 장점은 바로 이렇게 – 상당히 무겁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경우에도 – 결코 유머를 잃지 않고 가벼움과 경쾌함을 유지함으로써, 관객이 큰 거부감 없이 주제를 놀이처럼 다룰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박경종은 2023년의 전시 <그럴 수도 있지>를 위한 ‘작가의 글’에서 이렇게 적는다. 이는 “입장과 어투에 따라서 너그러운 배려, 또는 불평, 불만도 되는데,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지’에 다다르면 판단의 기준이 유연해진 대인배가 되기도 한다. 당연하지는 않았지만 노력해서 납득하거나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해진 규율과 법칙에 반해서 생각하고 기존 인식에서 벗어난 초연한 상태, 중립성을 유지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시점이다. 이번 전시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자 관람 포인트이다.” 박경종에게 ‘규칙과 법칙’은 과거, 기존의 것, 닫힌 경직됨을 상징하며, 그 ‘바깥’은 현재, 지금의 것, 열린 유연함을 상징한다. 이는 세계의 확정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 성질에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따라 나와야 하는, 태도이다. 박경종에게 이런 경직성과 유연함의 대비는 2021년의 ‘이발소’ 영상 프로젝트 <모발라이즈>에서 보여준 밥 로스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가 보여주듯 – 개념과 텍스트가 이미지를 지배하는, 그리하여, 주객이 전도된(?) – 현대미술의 엘리트주의적 위계질서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이런 태도는 모든 것을 그 나름의 관점에서 긍정하는 민주주의적 태도와도 관련된다).

박지혜 – 세계의 불확정성 앞에서 망설이는,
   박지혜는 2017년의 첫 개인전 에 붙인 <작업 노트>에서 “규격-한계-단위-양식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시스템 내 책임의 프레임을 읽어내고 그 과정에서 익숙하기 때문에 옳은 것, 명분으로서만 잔재하는 것 등 시대의 요구와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영역에 주목하고” 있다고 적는다. 어떤 사태에 대한 인식은 이미 사태에 대한 특정 방식의 선이해를 전제하므로, 인식은 이미 사태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칸트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우리는 프레임 없이는 아무것도 보거나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기존 시스템, 규칙에 대한 인식은 이미 기존의 시스템, 규칙으로부터 이탈하는 하나의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계를 작동시킨다. 따라서 박지혜의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기존 시스템에 대한 ‘스마트하고도, 쿨한’ 반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대항-시스템은 다시 정통-시스템이 되기 마련이다(순진한 믿음과는 달리, 모든 것은 옳음과 합리성을 전투의 장(場)으로 삼는 권력투쟁이다). “제가 작업 노트나 압박 면접 상황에서 반복 사용하는 어휘들이 있습니다. 기준, 조건, 한계, 양식, 규격, 합의, 기타 등등… 이들은 겉보기에 매우 견고하지만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의외로 쉽게 휘어지기도 합니다. 다만 이 단어들이 자주 나타나는 장소, 위치 때문에 왠지 극복해야 할 것 같은-반발심을 불러일으키죠. 하지만 글쎄요. 우리는 투덜투덜하다가도 시스템에 은근슬쩍 기대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거창한 제목인 『표준의 탄생』이 그냥 그런 어느 집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작가는 너무 투명한 말들과 너무 어두운 말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기울지 못하며 흔들리는 태도, 곧 망설임을 선택한다. 아마도 기존 규칙은 사라지고 새로운 규칙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기에 누군가가 취해야 할 윤리적으로 올바른 유일한 태도는 판단중지와 망설임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살고 예술을 행해야 하므로, 결국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말해야 한다, 너무 명확하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 늘 망설이면서.

정기훈 – 사회적 규칙의 개인화
   정기훈은 2022년의 전시 <연마술>의 <작업 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적 규칙들을 발견하고 재해석하여 개인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두고 설치와 영상으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전 2018년의 전시 <연중무휴>에서 정기훈은 이렇게 말한다. “작업에 규칙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규범과 규칙들이 개인의 삶을 보호해주고 있는지 아니면 규칙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지 나는 이러한 질문에 아주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많은 비평가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정기훈의 작업을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경제 시스템, 곧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반하는 예술적 작업’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근거이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나는 정기훈의 작업을, 보다 넓게 해석하여, 현재의 지배 시스템의 바깥을 상상하는 작업, 나아가 서양-현대-미술이라는 삼위일체의 바깥을 상상하는 작업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위한 일반적 논의는 보편성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오늘날 ‘보편성’과 ‘서양적 보편성’은 거의 등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이를 서양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고 명명했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보편성은 ‘개별자들을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그 개별자들로 만들어주는 메타적인 무엇’이다. 이처럼 보편성은 제국의 논리이다. 제국이란 ‘기준, 규칙을 제시하고, 이를 구성원들에게 현실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한 강제의 시스템’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작가들에게 20세기 유럽에서 설정된 서양 현대미술의 규칙들이 의식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이제까지 불편 없이 제국의 논리, ‘그들’의 규칙을 따라왔던 ‘우리’가 이제는 불편함을 느낀다는 말 이외의 어떤 의미도 아니다. 헤겔의 말대로, 인간은 오직 ‘불편한 것’에 대해서만 의식을 갖는다. 이는 현실과 의식 사이의 괴리, 곧 자기 소외이다. 한편 소외는 자신의 현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동을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오늘 우리 작가들이 규칙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적으로 ‘더 이상 서양의 규칙에 불편함 없이 적응할 수 없는’ 우리 작가와 사회의 성숙, 그리고 ‘오늘-여기-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규칙과 기준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표준의 탄생
   규칙의 인식 자체가 이미 규칙의 변형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미술계ㆍ예술계는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에 의해 해석된 유럽과 서양의 시스템, 규칙을 무비판적으로 내재화했다. 식민이란 이식(移植, 옮겨 심음)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까지 남의 눈으로 세계를 보아왔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과거 남의 눈으로 우리와 세계를 보던 우리의 작가들은 이제 오늘 나의 눈으로 우리와 세계를 본다. 대학 제도로부터, 갤러리, 옥션, 현대미술의 코드,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는 이 모든 시스템과 규칙에 대해, 우리는 오늘 묻는다. “이건 모든 규칙들은 누가 정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이미 그 자체로 내가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이끈다. 이는 이미 새로운 인식과 표준의 탄생에 대한 요청이다. 규칙(rule)을 만들고 해석하는 이가 지배자(ruler)이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겠다는 마음은 더 이상은 이렇게 내게 맞지 않는 남의 불편한 옷을 입고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이자, 내 생각의 옷은 이제 내가 해 입겠다는 의지이다(이는 그러한 능력을 전제로 하고, 이어 불가피하게 나의 옷이 우리의 옷이 되어야 한다는 지배의 의지, 제국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한 가장 좋은 요약은 박지혜가 2018년의 <표준의 탄생 – 에필로그>에 적은 다음의 말일 것이다.

“당신의 기준대로 읽으시오.”

허경

철학자. 대안연구공동체, 철학학교 혜윰.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철학박사.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인천아트플랫폼, 전주팔복미술공장 등의 레지던시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작가들을 대상으로 ‘철학과 작가노트’ 개념의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살롱 5120 제1회 웹진 ‘놀’ 문학공모 심사평

문학 공모

심사평

문화살롱 5120 제1회 웹진 ‘놀’ 문학공모 심사평

심사위원 일동


   문화살롱 5120이 펴내는 웹진 ‘놀’은 청년 예술인에게 창작의 기회를 펼칠 수 있는 지면을 제공하고자 지난 9월 13일부터 10월 22일까지 창간호를 위한 문학 작품을 공모하였습니다. 총 41명이 응모했으며, 108편(시 64편, 단편 소설 13편, 에세이 14편, 시나리오 6편, 미술비평 2편, 기타 8편)의 원고가 접수되었고, 이 중 문화살롱 5120을 위탁 운영하고 있는 단국대학교 부설 한국문화기술연구소 내부의 예비 심사를 거쳐 본선에 진출한 작품들(시 24편, 단편 소설 2편, 에세이 4편, 문학비평 1편)을 신중히 검토하였습니다. 본선 심사에는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소장 박덕규(소설가, 시인), 노원구 시인 조항록,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 교수 이은주(문학평론가)와 배혜정(미술평론가, 문화살롱 5120 디렉터)가 참여하였습니다. 문학성과 완성도 그리고 문장력을 고려한 심사를 거쳐 단편 소설 1편과 시 2편을 선정했습니다. 심사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설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다는 장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스토리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소설은 문제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소설이 스토리를 들려주는 데 급급해서는 곤란하다. 스토리를 품고 하나의 담론적 상황을 만드는 것! 이 점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란다. 이번 응모작 중에서는 「너는 겨울잠을 잔다」가 그나마 이런 고민을 거친 결과로 보인다.

   신인의 시에서 흠결을 들추기보다는 미덕에 주목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시를 쓸 테니까. 최종심에 올라온 8명의 24편 가운데 임혜리의 시 「표류」, 「다중우주의 당신」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임혜리의 작품들에는 삶의 비애가 깃들어 있다. 누구나 단독자로 살아낼 수밖에 없는 인생이 처연히 나뒹군다. 그래서 그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일이 아프지만 그것이 시인에게는 어쩌지 못하는 숙명이겠지. 그저 “경유가 목적인 삶”이라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당선자가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작은 위로를 건네면 좋겠다.

   웹진 ‘놀’의 다음 호에 더 많은 작품들이 응모되길 바라며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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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모

시 당선작

다중우주의 당신

임혜리


그 사람과 인사하지 못했다

비가 떠난 자리에 꺼끌꺼끌한 홈이 파였다

떨어진 새잎의 얼굴이 결코 닿을 수 없는 바닥

계절이 이별의 목선을 훑는 동안
당신은 어디로 갔는가

억겁의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애벌레의 오줌 같은 이슬이 손톱을 통과했다

물방울 속에 하나의 지구가 담겨있고
또 다른 당신이 있다

비로 환생하고 싶다던 당신
이제는 웃고 있을까

당신을 맞이하려고 우주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웅크렸다

안녕 인사하면
끝나지 않는 장마가 밤을 차갑게 도려낸다